서재필 귀국 환영식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왼쪽부터).
1946년 7월 25일 오후 2시 반 서울 덕수궁 석조전 2층 대형홀에서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과 국민당 당수 안재홍, 한민당 총무 원세훈 등 우익측의 유력인사 5명과
인민당 당수 여운형, 민족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 등 좌익 측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좌우합작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좌우합작은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대립이 심화되고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시작됐다.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방침이 발표되자
우익은 민주의원을 중심으로 반탁운동을 벌였고, 좌익은 민족주의민족전선을 만들어 찬탁운동을 전개했다.
게다가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정국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이승만을 중심으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좌익과 우익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같은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여론 또한 그 같은 방향으로 형성됐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에 맞춰 활기를 띠는 듯 하던 좌우합작위원회는
1개월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되면서 미국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방침을 전환하자 큰 타격을 받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마저 암살되자 12월 들어 위원회는 해체를 결의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민족의 단결을 통해 정치적 난관을 넘어서려 했다는 점에서
일제치하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진행되어 온 민족연합전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파가 존재할 수 없는 첨예한 좌우대립 속에서 민족의 일부 단결에 그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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