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0~11일에 걸쳐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대부분이 타 무너진 날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4분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붕괴되었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쯤,
채종기가 시너를 부은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일어난 불이 흰 연기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여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켜
불씨를 제거하고자 건물 일부를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며 화재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2월 11일, 오전 0시 25분경, 2층 누각 전체가 불에 휩싸이고 화재 4시간 만에 오전 0시 58분경 지붕 뒷면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곧 2층이 붕괴되었다.
이어 바로 1층에 불이 붙어 새벽 1시 54분에는 누각을 받치는 석축만을 남긴 채 모두 붕괴되어
발화 5시간 만에 2층 문루는 90%, 1층 문루는 10%만 소식 되었다
처음엔 전기시설의 누전 등으로 인한 화재라고 보도되었으나
화재 발화점인 2층에는 전기시설이 없었고 1층에 있었던 전기시설은 정상이었다고 수정 보도되었다.
이에 이어 숭례문에 5~60대로 보이는 흰머리의 남성이 흰색 항공점퍼 상의를 입고
가방을 메고서 휴대용 철제 사다리를 타고 철장을 넘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진술이 이어져
사건의 원인이 방화로 추정된다고 정정 보도되었다.
경찰은 숭례문 1층에서 일회용 라이터 2개가 발견됐다고 11일 발표했다.
다만, 이 라이터가 화재 사고와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소방당국에서는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나무기둥 아래에서 일회용 라이터 2개와 불에 탄 나뭇조각 등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복원
화재로 붕괴한 국보 1호 숭례문의 원형 복원에는 2~3년가량이 걸리며 예산은 200억 원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숭례문의 주요 부분들이 불에 탔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재현하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중요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의 하나로 2006년 숭례문의 실측 도면을 작성해두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원형 복원은 가능한 상황이다.
복원 사업은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서울특별시 중구청 주도로 진행될 예정이다.
숭례문은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은 피해를 복원하고자 지난 1961년~1963년 한차례 대규모 해체, 보수공사를 거친 바 있으며 이후에는 소규모 정비공사가 진행됐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에 숭례문 양측의 성벽이 잘라내어져 성곽 문루가 당당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고립됐다며
이번 복원 과정에서 숭례문에 양 날개의 성벽을 달아주는 방안과
원래보다 약 1.5m 정도 올라와 있는 지표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서울시와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복원에 쓸 수 있는 대형 대한민국 금강 소나무의 확보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며,
이를 안전히 사용하기 위해 건조하는 데만도 3년이 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최소기한을 5년으로 보고 있다.
잔해상태의 확인과 이의 재활용 여부, 그리고 건축에 사용된 나무의 수령과 재질,
사용연장 등의 조사에도 장기간 소요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당장의 추가붕괴와 훼손을 막기 위해 덧집을 씌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2012년 현재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이며,
2008년 8월 15일에 복원 현장을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또한, 문화재청은 옛 성곽자리를 그림으로도 복원하겠다고 밝히며 도로위에 옛 성곽자리를 표시했다
화재 진압에 대한 논란
숭례문 화재를 진압하는 데 5시간 이상이 소요되면서 화재 초기 소방 당국과 문화재청의 대처가 문제가 있었다는 논란이 있다.
또한, 숭례문 내에 배치된 소화기가 1,2층에 나눠 배치되고 상수도 소화전이 설치된 것과
사설 경비 업체의 무인 경보 시스템에 의존하였으며, 화재 감지기, 경보 설비 등은 전혀 없었다는 점도 화재 예방의 취약점으로 드러났다.
소방당국은 초기 진화 과정에서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점을 고려해서
신중한 진압작업을 펼쳤으나 정확한 발화지점을 찾지 못하고 소화 약재를 뿌리는 등 결국 초기 진압에 실패했다
책임 논란
숭례문을 개방한 서울시청과 중구청에 대한 이 사건의 책임 비판이 있다.
2004년 5월 27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숭례문 개방을 공약하였으며
문화재청의 부정적 견해를 무시하고 공사를 해 2006년 6월 28일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하였다.
이러한 숭례문 개방 사업이 청계천 복원사업과 함께 중요 치적으로 선전되었다.
이후 주간에는 근무자가 경비하였으나
2008년 초부터는 무선용역경비 업체인 KT텔레캅이 경비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방화범이 접근이 용이하게 하였다는 화근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5년부터는 삼성 에스원에게 유료로 맡겨오다가,
예산절감을 이유로 2008년 1월 문화재 지킴이 캠페인으로
무료경비를 자처한 KT텔레캅측으로 경비를 넘기며 경비인원과 경비재 및 경비횟수가 대폭 감소했다.
한편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2월 12일 국무회의 전 인터뷰에서
"파괴돼도 좋으니까 진화하라"고 소방방재청에 위임했었음을 밝혔다.
현재 문화재 관리책임은 지자체 즉 이 사건에서는 서울시청에 있지만 지도 감독 및 지원은 문화재청의 책임임을 인정하였다.
결국 유홍준은 2월 1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숭례문 화재 사건을 책임을 지고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며 사직서를 제출했음을 발표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국민성금으로 복원하자고 제안하였으며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후 국민 모금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쉬울 때마다 국민에게 손을 벌리냐"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그러자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이 당선인의 본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며 강제모금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또한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숭례문 화재가 "당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며 반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전,현직 서울시장의 소속당으로서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이라는 비판 주장이 있다.
한편 숭례문에 발생한 화재 진화에 필수적인 실측 도면이 화재 발생 2시간 후에 소방당국에 뒤늦게 전달된 것으로 드러나,
진화 과정에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사진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내용 출처 - 위키백과, 2008년 숭례문 방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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