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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895 . 4. 23 - 녹두장군 전봉준 교수형

1. 전봉준(1854~1895)이 녹두장군이라 불리는 이유

 

출생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부군 향교의 장의를 지낸 창혁의 아들이다. 그는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흔히 녹두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의 별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2.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녹두장군 전봉준은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 축조 이유로 농민들의 금전과 곡식을 강탈하자, 농민대표와 함께 바른 정치를 해주도록 호소하였으나 거부당하여 1894년 1월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부 패한 관리를 잡아 가두었다. 그 후 전주에 입성하여 외침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부패한 관리 처벌, 노비의 해방 등 폐정개혁안 12개 조목을 실천하기로 약속받고 진정하였으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 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12만 명의 군사를 지휘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일본군에 대항 하여 싸웠다.

동학 농민군은 중·남부 전지역과 함경남도, 평안남도까지 세력을 폈으나 공주. 금구 싸움에서 패한 후 순창 으로 잠적 재기를 꾀하다가 붙잡혀 1895년 3월 처형되었다.

 

3. 민요 파랑새와 전봉준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나무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솔잎 푸르다고

: 이 민요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 일반적인 것은 동학농민운동과 관계가 깊은 내용으로써 녹 두꽃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청포장수는 민중을 의미한다고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

 

 

※ 전봉준은 어떻게 살다 죽었을까? ※

 

1895년 4월 23일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이 서울에서 처형됐다. 향년 41세. 그 전해 공주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대격전에서 패한 그는 순창으로 피신해 동지들과 함께 재기를 모의하던 중에, 부하의 밀고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의 재판 기록은 전봉준 공초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1894년 1월의 고부 봉기에서 시작해 그 해 10월 금구싸움으로 마무리되는 갑오농민전쟁 또는 동학농민운동은 근대를 향한 조선 민중의 몸부림 가운데 가장 찬란하고 처절한 장면이었다. 이 농민 전쟁의 비극적 마무리로 결국 조선은 그 뒤 식민화와 뒤틀린 근대화를 겪게 되거니와, 이 전쟁 또는 운동의 한 가운데 있던 사람이 전봉준이었다. 녹두 장군 전봉준에 대한 민중의 애정과 기림은 민요 '새야 새야'의 가사에서도 또렷하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제폭구민(除暴救民)ㆍ진멸권귀(盡滅權貴)ㆍ축멸왜이(逐滅倭夷)라는 이 운동의 표어가 운동 주체들의 종교적 감수성때문인지 계급적 감수성 때문인지는 명확치 않다. 아무튼 그들은 19세기 말 조선의 정치 지형도 안에서 최고의 진보성을 대표했고, 그 진보성을 감당할 수 없었던 지배 세력은 나라를 외세에 내주는 길을 택했다.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그해 4월 전주를 점령해 전라도 지방에 미숙한 형태의 코뮌으로서 집강소를 설치했을 때, 그들은 시인 신동엽의 말을 빌면 "하늘을 보았다." 이 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그러나 슬프디 슬픈 분수령이었다.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전봉준의 옛집은 '전봉준 선생 고택지'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293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