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구분되는 질적 공리주의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정치사상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1806년 제임스 밀(James Mill)의 장남으로 런던에서 출생했다. 제임스 밀은 벤담의 제자이자 친우로서 대학교육과 종교를 불신하였지만 아들 밀의 교육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밀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3세부터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7세에는 이미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8세부터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한 밀은 많은 문학적 저작들과 역사서를 섭렵했고, 12세부터는 논리학과 경제학도 학습해 나갔다.
밀의 이러한 정신적 성장과정은 분명 천재의 그것이었지만, 자만할까 두려워한 아버지의 교육으로 밀 스스로는 자신이 천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교우관계가 부족했고,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나이에 걸맞은 놀이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을 정도라는 것이다.
밀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에 공리주의 사상과 정치경제학, 논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할 수 있었으나, 20대에 들어서면서 흥미와 의욕이 감퇴하는 등 정신 건강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스물한 살 때에 그는 극심한 신경 쇠약에 시달렸는데,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의 시와 마르몽텔(Jean-Franç;ois Marmontel)의 작품 등에서 위안을 얻었다. 특히 스물네 살 때인 1830년, 해리엣 테일러(Harriet Taylor Mill)를 만나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정신적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해리엣 테일러는 남편인 존 테일러(John Taylor)와 함께 자유주의적인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 활동을 하였으며, 급진적인 정치사상을 지니고 여성의 참정권 운동 등을 벌였다. 밀은 해리엣 테일러와 지적인 교류를 하며 우정을 쌓았다. 그리고 남편을 잃고 혼자된 해리엣 테일러와 1851년 결혼하였다. 그녀는 밀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자유론(On Liberty)>(1859)과 <여성의 예속(The Subjection of Women)>(1969) 등은 해리엣 테일러의 직접적 영향으로 저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해리엣 테일러는 1858년 밀과 함께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아비뇽(Avignon)에서 폐출혈로 사망했다.
밀은 1865년부터 1868년까지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의 학장으로 재임하였고, 같은 기간 동안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는 1866년 최초로 의회에서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으며, 비례대표제와 보통선거권의 도입 등 의회와 선거 제도의 개혁을 촉구했다. 또한 노동조합과 협동농장을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과 아일랜드의 부담 경감 등도 주장하였다.
밀은 철학뿐 아니라 정치학, 경제학, 논리학, 윤리학 등의 분야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자신의 대부이자 스승이었던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영향을 받아 공리주의를 사상의 기초로 하였으나, 쾌락의 계량 가능성을 주장한 벤담과는 달리 쾌락의 질적인 차이를 주장하며 벤담의 사상을 수정하였다. 밀은 인간이 동물적인 본성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질적으로 높고 고상한 쾌락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곧 “만족한 돼지가 되는 것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임이 좋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Socrates)임이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률에 의한 정치적 제재를 중시한 벤담과는 달리 양심의 내부적인 제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인류애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밀의 사상은 벤담의 ‘양적(量的) 공리주의’와 구분하여 ‘질적(質的) 공리주의’라고 불린다.
또한 그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비판하며 사유재산을 보장해 주면서도 자본주의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제한적인 정부개입을 옹호하는 경제학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가 저술한 <정치경제학 원리>는 고전경제학의 완결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고전경제학을 계승하면서도 사회주의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분배의 개선과 사회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이론을 담고 있다. 논리학에서도 실증주의적인 사회과학 방법론을 체계화하는 성과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사회적 입법을 통한 개혁을 주장하며 현실 정치에도 직접 참여하였는데, 특히 노동입법이나 단결권의 보호, 지대(地代) 공유 주장 등을 통해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와 사유재산 보호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분배의 평등을 강조하는 영국 사회주의 사상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사회적 공리의 실현을 위해 보통ㆍ비밀선거에 기초한 의회와 선거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뿐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경제적 기회도 똑같이 제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자유론>에서 밀은 ‘다수의 전제’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사상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선택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강조한다.
어떤 사상이 옳든 그르든 사상의 자유와 언론ㆍ출판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데, 이는 인간 정신이 토론과 경험을 통해서 잘못을 시정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없다면 개인의 행위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개성이 발달되면 한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 전체도 더 활기 넘치게 될 수 있다. 때문에 개인이 한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한 자발적 선택권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그는 사회나 국가가 개인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이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한계에 대해 논했다.
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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