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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걸프전 이후 전쟁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당시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유엔(UN)의 무기사찰을 거부하고 군비확장을 계속해왔다.
미국은 걸프전 이후 이라크를 불량국가,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으며 후세인을 '제거대상 1호'로 지적해왔다.
또한 미국은 2001년 9.11테러사건 이후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으며,
2002년 8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유엔 연설에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WMD) 폐기 등 요구하고 정권교체를 언급했다.
이후 미국은 2003년 2월 유엔 안보리에 이라크 침공 승인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였고
결국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유엔 안보리의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미국과 영국이 주장한 침공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이라크는 과거 대량 살상 무기의 보유를 밝힌바 있고, 여전히 그 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세계의 안보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국내에서 쿠르드인을 탄압하는 등 많은 압정을 실시하고 있다.
◈ 거듭되는 유엔 사찰의 방해 때문에, 대량 살상 무기의 폐기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 거듭되는 사찰 방해 때문에, 걸프 전쟁의 정전 결의인 유엔 안보리 결의 687이 찢어지고 있다.
◈ 유엔 안보리 결의 1154와 "앞으로의 어떠한 안보리 결의 위반도, 이라크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결과를 부른다."고 하는,
걸프 전쟁 정전 협정(위의 687) 파기 조건의 결의, 즉 마지막 경고 결의가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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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한달여에 걸친 공격으로
100여만 명이 넘는 이라크군은 수적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이로 인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고 미국과 영국의 점령군이 이라크에 들어섰고, 곧 후세인이 체포됨으로써 실질적인 전쟁은 종전되었다.
하지만 미군이 후세인 독재세력의 지지기반을 와해시킴으로써 그동안 유지되던 이라크 내 치안이 와해되어
보복살해 등 종파분쟁이 발생하고 치안부재로 인한 무장세력의 형성과 이들의 저항으로 미군 수천 명이 전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때문에 미군은 이라크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7년여를 더 주둔하다 지난 2010년 8월 20일. 모든 전투병력을 철수시켰다.
한편, 미국과 영국 측이 승전을 선포한 뒤의 2004년 10월, 미국이 파견한 조사단이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보고를 제출했고,
전쟁을 시작한 근거가 된 대량 살상 무기의 정보의 신빙성도 희박한 것이었던 것이 밝혀져 이 전쟁의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참고자료 : 네이버 백과사전 - 이라크전쟁
위키피디아 - 이라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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