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활동한 대한민국의 팝, 힙합, 랩 록 음악 그룹이다.
보컬, 작사·작곡의 서태지와 코러스 및 백보컬과 안무를 맡은 이주노, 양현석 세 명으로 구성되었다.
1992년 1집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하였으며 4집 《SEOTAIJI & BOYS IV》를 끝으로 해체되었다.
시나위의 해체 이후 서태지는 당시 대한민국에 막 도입되기 시작한 미디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다.
TV저널 올해의 스타상,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 디스크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Yo! Taiji》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 판매량인 18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1993년 6월에 발표된 2집은 〈하여가〉로 활동을 시작하여 국내 최초로 220만장 이상 판매고를 기록했다. 또한 다시 한 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으며, 각종 상을 수상하게 된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하여가〉의 힙합음악에 국악을 접목시킨 음악과 〈수시아〉의 158비트에 달하는 빠른 멜로디는 2000년대 초 테크노 열풍에 한발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4년 8월 3집 앨범을 발표하며 〈발해를 꿈꾸며〉를 시작으로 3집 활동을 시작한다. 3집에서는 기존의 댄스 음악의 비중이 약해지고 록의 비중이 늘어났다. 댄스 음악에 열광했던 일부 팬들은 실망하기도 하였으나, 한국의 교육을 비판한 〈교실 이데아〉 등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3집은 16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대한민국 100대 명반에 선정되었다.
사회적인 색채의 음악과 그에 대한 당시 10대 팬 들의 반응 이후 ‘서태지 담론’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1994년 대한민국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는 등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가 시도한 음악적 변화 자체는 큰 대중적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서태지의 음악적 성취가 재평가 되면서 3집 수록곡인 〈발해를 꿈꾸며〉가 고등학교 7차 교육과정의 '음악과 생활'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1992년, 1993년, 1994년에는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당대 아티스트들이 모인 환경 콘서트인 '내일은 늦으리'에 참가하여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더했다.
훗날 서태지는 4집 발표 전에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1~3집 활동 기간 동안 큰 인기를 누린 그들이지만, 너무나 바쁜 일정, 시간에 쫓겨 앨범을 만드는 데 대한 부담이 너무나 컸다고 그 후 당시를 떠올리며 심경을 밝혔다.
3집에서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록, 메탈 등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10월에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컴백 홈〉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갱스터 랩은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생소한 장르로, 기존의 인기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일부의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4집 음반은 발매 첫날 30만장이 팔리는 등 총 240만장 이상이 팔려 당시까지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세 번째 더블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앨범 발매 때마다 그러하듯, 서태지와 아이들은 각 방송사 가요순위 1위를 휩쓸었고, 〈컴백 홈〉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학생의 이야기가 각 방송사 뉴스를 통해 전파를 타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또한 <컴백 홈> 방송 출연 당시 립싱크 공연에 반발하여 마이크를 아예 소지하지 않는 등의 파격 행위도 이어졌다.
1995년 연말에 큰 활약을 펼친 후에도 그들은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 비디오를 만드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였으나, 이듬해 1월 19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방송된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1월 31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라 창작의 고통이 컸으며 화려할 때 미련없이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와 아이들의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영향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로 대한민국 음악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발라드나 트로트 음악 등이 대한민국 대중 음악계의 주류를 이루었으나,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로 랩 음악이 가미된 댄스 음악이 가요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가요계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1992년 5월을 기점으로 구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활동은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반향도 불러 일으켰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은 “10대들의 대통령”이라 불리며 청소년들의 지지를 얻었다.
4집 앨범 수록곡 중 〈시대유감〉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에 통과하지 못하자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가사가 전부 삭제된 채 앨범에 실렸으며,
이 외에 다른 수록곡들도 심의에 제출된 곡의 가사와 앨범에 실린 곡의 가사가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물의를 빚었다.
결국 이 사건이 음반 사전 심의규제 폐지 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고,
현재 사전 심의 제도는 폐지된 상태이다.
수상
1992년 TV저널 올해의 스타상 대상
1992년 서울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최고인기가수상
1992년 골든디스크 본상
1992년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
1992년 MBC 10대 가수가요제 최고 인기가요상, 신인가수상
1992년 SBS 가요대전 대상
1993년 서울가요대상 작곡상, 기획상, 올해의 가수상, 최고인기가수상
1993년 대한민국 골든디스크 본상
1993년 KBS 가요대상 본상
1993년 MBC 10대가수가요제 본상
1993년 SBS 가요대전 대상
1994년 MBC 10대가수가요제 본상
1994년 KBS 가요대상 본상
1994년 서울가요대상 본상
1994년 골든디스크 본상
1995년 KBS 가요대상 본상
1995년 서울가요대상 최고인기가수상
1995년 골든디스크 최고인기가수상
1995년 MBC 10대 가수가요제 최고인기가요(컴백홈)
1996년 MTV MUSIC VIDEO Asian Viewer (컴백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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