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61.8.30-한국노동조합총연맹 결성 1946년 3월 10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으로 발족한 뒤, 6·25전쟁 후인 1954년 4월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대한노총)로, 1960년 11월 한국노동조 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이듬해 5월 최고회의 포고에 따라 해산되었다가, 같은 해 8월 한국노동조합총연맹(산하 16개 산업별 노 조와 1개 연합노조)을 결성해 오늘에 이른다. 주요 목적은 ①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를 비롯한 제인권과 노동3권을 토대로 한 노동기본권의 확보 ② 임금·근로조건의 유지·개선과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위 향상 ③ 노사 간의 대등성과 자율성에 바탕을 둔 노사관계의 근대화 및 산업민주주의 실현 ④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와 전체 노동자의 권익 신장 ⑤ 가맹조직의 단결 강화와 자주적 노동.. 더보기
1952.08.29 -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초연 2008년에 MBC가 방송했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신임 시장이 강마에에게 취임 축하 공연을 강요하자 강마에께서 제대로 어퍼컷을 날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모든 연주자들은 조용히 악보만 바라보고 있고, 전임자가 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미워하는 신임 시장은 "저게 뭐야"라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곡이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입니다. 1952년 8월 29일, 처음으로 뉴욕 주 우드스탁에서 데이빗 튜더(David Tudor)가 초연했습니다. 데이빗 튜더는 피아노 건반 뚜껑을 열었다가 몇 분 후 닫기를 2번 반복한 것으로 연주(?)를 마쳤습니다. 《4분 33초》는 악보가 없이 I. TACET, II. TACET, III. TACET라고 쓰여 있고, 각.. 더보기
1952.8.28- 대한민국과 일본 간에 독도 분쟁 첫 발생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서 일어나는 독도에 대한 영토 분쟁을, 통칭 독도 분쟁이라 한다. 현재,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독도 외에 동해의 다른 섬들도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여 영토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현재 독도를 실질 점유 통치하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다. 이 분쟁에는 현재 이전에 쓰여진 독도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다. 대한민국 측은 우산도라고 쓰여진 여러 가지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적 문헌, 지리, 지도, 백과사전을 부분 인용하며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측은 여기에서 나오는 우산도를 현재의 독도라고 주장하지만, 일본 측에서는 이를 죽서, 관음도, 울릉도, 혹은 존재하지 않는 섬이라고 주장한다. 학계에서는 역사적 기록 혹은 지도에서 나오는 독도가 여러 세월에 걸쳐.. 더보기
1907. 08. 27 - 마지막 황제 순종, 경운궁에서 즉위 순종은 한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로 고종의 유일한 적자이자 장자로 명성황후 민씨 소생이며, 후사는 없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였으며 일본인에게 매수된 내관이 그가 마시던 홍차에 독을 타서 건강을 잃게 했다. 1907년에 고종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등을 비밀리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 실패 이후,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로 고종은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뒤를 이어 순종이 제위에 올라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그러나 그를 정식 군주로 인정하지 않던 일부 세력은 그를 황제나 주상이라 부르지 않고 전각의 이름을 따서 창덕궁 전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무렵 일본이 러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다른 식민지 열강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이른바 후견국을 .. 더보기
1789. 08. 26 - 프랑스 인권선언 발표 1789년 8월 26일 프랑스는 국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인권선언문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정식명칭은 '인권 및 시민의 권리 선언'이라고 하는데 전문과 함께 17조로 구성된 본문이 함께 한다. 이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유럽지역에서 형성된 민주주의 사상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인권선언문을 통해서 프랑스 헌법제정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로도 다른 나라들의 법 제정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한 조항을 짚어보자면 제6조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대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내용이 담긴 프랑스 인권선언은.. 더보기
1900.08.25 독일철학자 니체의 사망 독일의 철학자. 생(生)철학의 대표자로 실존주의의 선구자, 또 파시즘의 사상적 선구자로 말해지기도 한다. 본 대학을 거쳐 스위스의 바젤 대학 교수직(1869~1879)을 그만두면서부터 고독한 생활을 하다가 정신이상으로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종래의 합리적 철학, 기독교 윤리 등 모든 종래의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철저한 니힐리즘(nihilism)을 주장하여 생(生)의 영겁회귀(永劫回歸) 속에서 모든 생의 무가치를 주장하고, 선악의 피안에 서서 '약자의 도덕'에 대하여 '강자의 도덕'을 가지고 '초인'(超人)에 의해서 현실의 생을 긍정하고 살아야 함을 주장했다. 이 사상 속에는 생물진화론의 생존투쟁의 사고가 존재하고 있음과 동시에,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진행해 가는 19세.. 더보기
1618.8.24-허균 세상을 떠나다 1589년(선조 22) 생원이 되고, 1594년 정시문과에 급제, 검열·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냈다.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가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형조정랑을 지내고 1602년 사예 ·사복시정을 거쳐 전적·수안군수를 역임하였다. 1606년 원접사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610년(광해군 2) 진주부사로 명나라 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단을 얻어왔다. 같은 해 시관이 되었으나 친척을 참방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으로 물러났다. 당대 권신이었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론을 주장하였으며 예조참의·호조참의·승문원부제조를 지 냈다. 1617년 폐모론을 .. 더보기
1939.8.23 - 독일·소련 불가침조약 조인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와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외상 몰로토프간의 5시간 회담끝에 1939년 8월 23일 오전 10시 기한 10년의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됐다. 양국은 또 폴란드 분할에도 합의했다. 히틀러는 이미 베르사유체제를 파기하고 대독일 회복에 나서 상당히 성공한 상태였다. 그러나 점령지역과 독일을 잇는 단치히 지역이 아직 미수복지로 남아있어 이해 3월 히틀러는 폴란드에 단치히 지역 양도를 요구했다. 영국 챔벌렌인 수상은 폴란드에 원조를 약속했고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대비해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소련과 함께 3국 군사동맹 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회담은 결렬되었고, 이에 소련은 독일과의 관계회복에 나섰다. 8월 16일 몰로토프 외상은 1.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2. 독일이 일소관계 개선에 노력 3. 발.. 더보기
1911.08.22 - 모나리자 도난 발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모나리자 도난 사실을 발표한 1911년 8월22일은 모나리자에게는 오히려 제2의 생일이 됐다. 그때까지 모나리자는 다른 르네상스 걸작들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신문들이 루브르의 관리소홀을 질타하고 한편으로는 연일 모나리자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자 관심이 모나리자에게 세간의 뜨거운 관심이 집중됐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가 그런 명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고, 자신들이 ‘라 조콩드’라고 부르는 모나리자의 미소도 새롭게 알게 됐다. 경찰은 피카소를 혐의 선상에 올리면서까지 철저한 수사를 진행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시간도 어느덧 2년이 흘러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차 잊혀져갈 무렵, 우연한 기회에 범인이 잡힌다. 페루지아라는 이탈리아 화가가.. 더보기
1983.08.21 - 필리핀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 1983년 8월 21일 이 날은 필리핀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가 3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마치고 총선 출마를 위해 고국으로 돌아오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니그노 아키노는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 준비되어 있던 차량에 올라타기 직전 한 암살범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암살자는 코앞에서 아키노의 얼굴을 쐈습니다. 범인은 현장에서 경찰과 군인들에게 사살당했습니다. 1984년 10월 중립조사위원회는 당시 필리핀군 참모총장 파비안 C.베르 장군이 꾸민 음모로 발표했지만, 필리핀 국민들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부가 범인과 관계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 필리핀 민주화의 시발점 당시 50세였던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는 3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하면서 기내에 동승한 기자에게 이렇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