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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971. 04. 10 - 미-중 핑퐁외교 시작 1971년 4월 10일, 같은 달 6일에 열린 제31회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탁구 선수를 비롯한 미국 선수단 15명과 기자 4명이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면담을 가진 데 이어,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을 순방하면서 미국과 중국에 교류의 징검다리를 놓은 사건을 핑퐁외교 혹은 탁구외교라 한다. 이 일을 계기로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했으며 1972년 2월에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미국과 중국 양국이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1949년에 중화 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로 미국 스포츠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하기는 처음이었다. 냉전 체제하에서 국교도 없이 오랫동안 서로 적대 시 해온 미국과 중국이 갑자기 .. 더보기
1948. 04. 03 - 제주 4.3 사건 발발 제주 4·3 사건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에 반대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독립촉성중앙회 등 극우단체 회원들이 희생되었고, 이에 분노한 극우 세력은 극우 세력대로 살상을 자행했다. 여기에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극우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도 터져나와 유혈사태는 크게 번져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제주 전역에 행정기능이 마비되는 등 심각한 치안불안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제주 4·3사건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인적피해를 보면, 에 의한.. 더보기
1883. 03. 06 - 태극기 정식 국기 제정 태극기의 유래에 관하여는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 그들이 편승한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明治丸)선에서 고안하여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는 잘 못 알려진 것이며, 국기 문제가 논의된 때는 이보다 앞선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이며, 박영효 이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도 쓰였음이 밝혀졌다. 또한, 군주를 상징하는 어기로서 “태극 팔괘도”가 규장각에 있었다. 국왕을 상징하는 어기를 사용하던 조선이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의 마건충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마건충이 제안한 조선의 국기인 ‘청룡기’는 청의 국기인 ‘황룡기’.. 더보기
1919. 02. 08 - 독립선언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 대통령 T.W.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계기가 되었고, 직접적으로는 1918년 12월 15일자 《The Japan Advertizer》에서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와, 12월 18일자에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된다고 하는 보도에 접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에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