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경향신문 2012년 12월 13일자 에세이- 다시, 친구가 그리운 시간을 발췌한 것입니다.
‘쌍방과실’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오래 되새김질하게 될지 몰랐다. 이쪽과 저쪽 모두, 부주의나 태만 따위에서 비롯된 잘못이나 허물. 사건사고
의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밝히는 데에나 쓰일 이 부드럽지 않은 말을 오랜 친구가 나와의 관계를 두고 썼다는 것은 의외로 둔중한 울림을 불러왔
다.
청춘의 한 시기를 함께 울고 웃고 다투며 보낸 친구였다. 스무 살의 봄에 만나 수업을 빼먹고 춘천 가는 기차를 같이 탔고 배를 타고 멀리 떠나
유채꽃 핀 제주도와 비 맞은 검은 돌이 반짝이는 보길도를 같이 여행했다. 최루탄을 같이 맞았고 돌을 같이 던졌고 시집을 같이 읽고 아르바이트를
같이 했으며 노래를 같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 시절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같이 읽으며 깊이 공감하던 친구였다.
“…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약속도 하지 않았을까.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더라도 잊지 말고 좋은 친구가 되자고. 나이 들면 옆 동네에 같이 살자고 편지라도 쓰지
않았을까. 사람살이의 단계를 하나둘씩 넘느라 십수년이 흐르는 동안 친구와 나를 뚫고 간 수많은 어려움과 귀중한 것들을 잃은 상실의 횟수는 말
해 무엇 하랴. 신산고초 많이 겪고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나이가 되었는데, 이제 지란지교를 꿈꾸는 시의 마지막처럼 ‘맑고 높
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믿었는데, 우리는 어이없게도 서로를 잃었다.
4년 전, 서로의 삶에서 마지막 고비처럼 찾아온 가장 힘든 산을 헉헉대며 오르던 그때,
우리는 각자 제 짐이 너무 무거워 친구 등의 짐을 덜어줄 여유가 없었고 심지어 산을 오르는 방식과 걸음걸이를 탓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내가 올라
야 할 산이 더 높고 험해, 내가 진 짐이 훨씬 더 무거워. 너는 왜 그렇게 사니까지. 역지사지는커녕 친구라면 응당 해주었어야 할 경청과 위로도 하
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며 돌아섰다. 민망하고 참혹하게.
그러나 세월이 이만큼 흘러갔으니 잊히기도 했으리라 믿으며 만날 약속을 하던 중에 들은 말이 바로 그 단어, 쌍방과실이었다. 친구는 아직 만날 준
비가 되지 않았고 나는 수굿이 내 잘못을 인정했다.
과실의 절반은 나에게 있다는 반성을 하는 와중에 또 다른 친구와 다시 한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마치 남자들처럼 ‘우리는 불알친구’라
며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친구였는데 도를 넘는 하소연과 가시돋친 충고를 마구 해댔던 것이다. 한순간에 정신없이
권투를 하듯이 퍽퍽 ‘잽’과 ‘훅’과 ‘어퍼컷’을 날려버리고 난 후 두세 계절을 보내면서 이번에는 쌍방과실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 과실임을 알아차렸
다. 사람은 스스로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낼 때는 자중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그리하여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 친구의 사전
적 의미라면 나는 많지 않은 친구들 중 벌써 두 사람을 잃은 것만 같다. 이제야말로 친구가 중요해지는 시기라는데, 사느라 바빠서 소원했던 친구들
도 다시 만나기 시작하는 이 중요한 때에 말이다.
조용한 자책과 침잠 속에 들어앉아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를 보고 또 보았다. 미국 시애틀 병원 의사들의 사랑과 일에 대한 이 드라마를
몰두해서 자꾸 본 이유는 두 의사 메러디스 그레이와 크리스티나 양의 우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엄청나서였다. 의사로서도 능력자인 그녀들은 연애
하고 결혼하고 일하느라 촌음을 아껴 쓰면서도 서로의 관계를 지켜가는 데 신실하기 그지없다. 두 친구는 서로에게 ‘You are my person’이란
말과 ‘I am your person’이란 말을 주고받는다. 서로의 삶에 위기가 닥칠 때, 우울하고 어두울 때, 어려운 선택을 앞두었을 때마다 나직하게 서
로에게 건네주는 그 말은 연인에게 고백하는 사랑의 말보다 더 큰 응원과 지지가 되어준다.
살면서 이런 말을 할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두 여자의 친구관계는 시즌 초부터 몇 년 동안 변함없이, 아니 깊이와 넓이를 더
해가며 진화 중이다. 죽어가면서 전 재산을 골고루 여고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영화 <써니>의 우정도 감동스럽고, 모든 고민을 나누며 사는 <섹스
앤 더 시티>의 네 여자의 우정도 눈부시지만 메러디스 그레이와 크리스티나 양의 담백하고도 깊은 사귐은 관포지교와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것 같
다. 너는 내 사람이야. 나는 네 사람이야. 이런 말을 주고받을 신실한 친구가 그립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입장을 중하게 여기고 내 힘듦의 크
기가 더 크다고 주장하고 친구 편에 서주지 않고 공감할 줄 몰랐던 과실을 깨달은 지금. 스무 살처럼 다시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같이 읽는 날이 올
수 있을까.
“…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
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과 시끄러운 소
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경향신문 2102. 12. 13 [정동에세이]다시, 친구가 그리운 시간
'Knowledge Archive (Stalk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쉽게보는 스포츠 _ 2014 브라질 월드컵 : 축구 규칙 알고 보자 ! (0) | 2013.06.12 |
---|---|
여행을 떠나요! (1) | 2013.01.03 |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1) | 2012.12.06 |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 .. (0) | 2012.10.05 |
만남과 이별의 장소가 되는 터미널. <드라마 스페셜 - 터미널> (3) | 2012.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