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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10. 02. 14 - 안중근 의사 사형 선고 "사형!" 판사가 형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일본에서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 1910년 2월 14일 그에게 사형 선고가 떨어졌다. 고등법원장은 그에게 상고를 권하였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의 어머니는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는 말을 전했다. 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 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더보기
1967. 02. 13 - 청마 유치환 타계 1967년 2월 13일 청마 유치환 타계 [柳致環, 1908.7.14~1967.2.13] 호 청마(靑馬). 경남 통영 출생. 유치진의 동생으로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귀국하여 동래고보(東萊高普)를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정지용의 시에서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 1931년 《문예월간》지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데뷔, 그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작을 계속, 1939년 제1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간행하였다.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허무와 낭만의 절규 《깃발》을 비롯한 초기의 시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만주로 이주, 그곳에서의 각박한 체험을 읊은 시 《.. 더보기
1940. 02. 11 - 창씨개명제 실시 조선총독부가 1939년 11월 10일에 공포한 창씨개명제를 1940년 2월 11일부터 실시했다 창씨개명 또는 일본식 성명 강요는 1939년 ~ 1946년 사이에 일본 제국이 조선인과 타이완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제도이다.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던 이들은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응하기도 하였고 또는 반대로 일본 정부의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 중에서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의 뜻을 담은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자도 있었다.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의 개인적인 정책으로, 일본 제국 조정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정책이라 일본인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42년 미나미가 조선총독에서 해임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창씨개명은 1941년 1월부터 본격 실시되었으.. 더보기
2008. 02. 10 - 숭례문 방화사건 2008년 2월 10~11일에 걸쳐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대부분이 타 무너진 날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4분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붕괴되었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쯤, 채종기가 시너를 부은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일어난 불이 흰 연기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여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켜 불씨를 제거하고자 건물 일부를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며 화재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2월 11일, 오전 0시 25분경, 2층 누각 전체가 불.. 더보기
1881. 02. 09 -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 사망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마린스키 자선병원 의사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이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의사의 신분은 중인 계급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으며 매우 엄격하고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자식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1838년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군사 교육을 받게 되었다. 소심하고 예민하며 병약했던 소년 도스토옙스키에게 군사 훈련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문학은 유일한 위안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 습작을 서로 평가하고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 낭만주의 사조가 유행하던 시기로 도스토옙.. 더보기
1919. 02. 08 - 독립선언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 대통령 T.W.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계기가 되었고, 직접적으로는 1918년 12월 15일자 《The Japan Advertizer》에서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와, 12월 18일자에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된다고 하는 보도에 접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에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 더보기
1992. 02. 07 - 마스트리흐트 조약 조인 지난 1992년 2월 7일에 마스트리흐트 조약 (Verdrag van Maastricht, Maastricht Treaty, 유럽 연합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은 네덜란드의 도시 마스트리흐트에서 유럽 공동체 가입국이 모여 서명한데서 이름이 지어졌고 이듬해인 1993년 11월 1일부터 발효한 조약으로 현재 유럽 연합 (EU) 의 기초가 되는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유로화의 도입이 이루어 졌으며, EU의 3가지 중심 구조(경제 및 사회 정책, 공동의 외교 및 안보, 사법과 국내 문제)를 제안 되어졌다. 공동의 외교 및 안보에 관한 조항은 유럽 정책 연합(European Political Cooperation, EPC)의 기초 위에 만들어졌으나 이것을 더 확대해 마스트리흐트 조약으로 만들어 .. 더보기
2003. 02. 05 - 금강산 육로 관광 재개 2003년 2월 5일, 휴전 50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을 오가는 관광도로가 뚫렸다.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등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사전답사단 87명은 이날 오후 2시30분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버스 10대에 나눠타고 휴전선을 넘어 동해선 임시도로를 따라 북한으로 향했다. 민간인들이 판문점을 거치지 않고 다른 지역의 도로를 통해 남북을 왕래하는 것은 지난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이다.(조선닷컴 http://db.chosun.com/DBmain.html) 더보기
1906. 02. 01 - 조선통감부 설치 1906년 2월 1일 - 조선통감부 설치 1906년부터 1910년 국권을 빼았길 때 까지 한국을 지배한 일본의 통감부가 1906년 2월 1일 설치됐습니다. 이후 통감부는 조선총독부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1905년 11월 체결한 을사조약 규정에 따라 한국은 1906년 1월 31일부로 일본공사관이 폐쇄되었고, 이날 임시통감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취임하면서부터 업무가 시작됐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고 이어 내정까지 간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강제로 맺게 됩니다. 이를 통해 통감이 입법,사법,행정 전방에 걸친 통치권을 전담하게 됬으며, 한국인 대신 밑에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일본인을 차관으로 두는 이른바 차관.. 더보기
1986. 01. 28 - 챌린저호 폭발 챌린저호 폭발 오전 11시 30분경,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된 지 70여 초 후 폭발하였다. 시속 3,220㎞의 속도로 14.5㎞ 상공까지 도달했을 때였다. 승무원 7명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들은 우주선에서 발사 후 사망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1967년 발사대에서 3명의 우주 비행사가 사망한 적은 있다). 이 사고가 특히 유명해진 것은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우주 비행을 위해 선발된 크리스타 맥컬리프라는 이름의 교사가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맥컬리프의 남편과 아이들은 물론 다른 우주비행사들의 가족들까지 발사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번 참사는 설문 조사 결과 설문에 응답한 미국인 가운데 85퍼센트가 사고 발생 한 시간 이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