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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73.8.8-김대중 납치사건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도쿄의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0호실 부근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8월 13일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입니다.

 

사건발생 당시 김대중은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한국 정보기관 요원 5명에게 납치,

수장(水葬) 직전 극적으로 구출되어 사건발생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집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박정희의 최대의 정적으로 등장한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될 당시 지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중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 해외에서 반유신활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정력적으로 반체제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한편, 73년 7월 6일 재

미교포들의 반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결성, 그 명예회장이 되었으며, 일본에서도 8월 13일 도쿄 한민통을 결성할 예정이었

습니다. 김대중의 이러한 활동은 박정권의 비위를 거슬리기에 충분했고, 이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외의 비난여론은 일제히 박정권에 집중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권력 개입설을 완강히 거부하던 한국정부는 일본 경시청이 사건현장에서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

착하고 사건관련자의 출두를 한국에 요구하자, 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내에서는 <국권 침해>에 대한 강력한 비난여론이 대두,

 한일정기각료회의 연기,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 취소, 경제협력 중단 등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오던 한·일관계가 갑자기 교착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이후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간의 막후 절충을 통해 관계정상화가 시도되어

△1등서기관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 등에 합의,

사건발생 86일 만에 김대중사건은 정치적으로 결말지어졌습니다.

 

이로써 무기연기되었던 한일각료회의가 12월 22일 열리고 중단된 차관사업도 재개되었으나, 주권침해·한국중앙정보부 관련설·범인출두·김대중의

 원상회복 문제 등은 사건진상과 더불어 세월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