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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899. 02. 25 - 로이터 통신 창립자 로이터 사망


독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844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로이터라는 이름을 얻었다. 독일 괴팅겐에서 삼촌이 경영하는 은행의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뛰어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알게 되었다. 가우스는 그당시 전신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장차 뉴스보급의 중요한 수단으로 쓰이게 되었다.

1840년대초 로이터는 베를린의 작은 출판사에 들어갔다. 정치적 소책자를 많이 출판하여 당국의 미움을 사게 되자 유럽 전역에 혁명의 파도가 몰아치던 1848년에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논설기사와 상업적 뉴스 등을 발췌·번역하여 독일의 신문들에 보내기 시작했다. 1850년에 독일 전신선의 종점인 아헨과 프랑스-벨기에 전신선의 종점인 브뤼셀을 잇는 전서구(傳書鳩) 통신사업에 착수했다. 1851년에 영국으로 이주한 로이터는 런던 증권거래소 부근에 전신사무소를 열었다. 처음에 그의 사업은 주로 상업통신에 국한되었으나 일간신문이 번창하면서 그는 몇몇 발행인들을 설득하여 그의 고객으로 가입시켰다. 그가 거둔 최초의 눈부신 성공은 1859년에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에서 벌어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간의 전쟁을 예고한 나폴레옹 3세의 연설 원문을 런던으로 전송한 것이었다.

해저전신망이 널리 보급되면서 로이터는 다른 대륙에까지 그의 사업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동안 경쟁을 벌인 뒤에 로이터와 다른 두 경쟁사인 프랑스의 아바와 독일의 볼프는 지역분담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따라 아바와 볼프는 각기 자기 나라와 유럽 일부 및 남아메리카 지역을 맡았다. 이 세 통신사는 오랫동안 전세계 통신사업을 사실상 독점했다. 로이터는 1871년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에게서 남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뒤에 영국에서도 남작 특권을 얻었다. 1878년 로이터 통신사의 사장직에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