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 저항이라고 하면 밟힌 지렁이가 꿈틀대거나 전쟁에서 배수진을 치고 덤빌 때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의 저항을 곱고 아름답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이 않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시인들이 아닐까 싶다.
저항을 시(詩)로 표현 한다는 건 단어 하나 하나 표현 하나 하나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이상화가 아닐까 싶다.
대구의 대표적인 저항시인 이상화. 그는 시(詩)로 소리 없이 아름다운 저항을 하였다.
<중학교 시절 이상화>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 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생각고 사느니 차라리 바라보며 우는 별이나 되자”
- 이별 -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나의 침실로-
그가 쓴 대표적인 시들에 나오는 표현들이다. 그가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시인으로 불리 울 수 없을 것이다. (대구의 문화 인물1. 2006)
<1919년의 청년회의소 둘째줄 왼쪽에서 셋째가 이상화>
그가 남다른 민족의식으로 독립운동도 하고 이를 통해 저항시를 쓴 것은 확실하지만
그가 아름답다고 전해지는 시를 쓸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단순히 일본 유학까지 갔다 온 고등 교육의 산실이나 큰 부자이면서 중추원(조선총독 개인의 자문기관으로서, 일제의 친일관료 육성, ‘보호정책’이라는 식민지 분할통치방식에 의해 대한제국 이후 친일세력으로의 적극적인 변신을 추구한 친일인사들의 최종적인 귀속기관이었다) 참의를 거절한 백부와 명망 있는 상류층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십대 후반 이상화>
그러나 또 다른 이유를 꼽아 보자면 이상화의 인생에 있는 여자들이 아닐까싶다.
민족의 고통의 통한이 시를 쓰게 했을지도 모르나 그가 사용한 표현을 보면 ‘사랑’을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상화의 절친인 ‘백기만’은 이상화의 인생엔 다섯 여인이 있다고 했다.
첫번째는 첫사랑인 손필련. 그가 19살에 알게 된 동갑내기 여인이었으나 백부의 엄명으로 다른 지역으로 장가를 들게 되어 이별하고 만다.
두번째로 20살에 동경에서 만난 유보화라는 미인으로 깊은 사랑에 빠졌으나 폐병으로 숨을 거둔다.
그리고 가장 오랜 기간(5년)을 만난 미모의 기생 송소옥이 있으며,
그리 알려진 것이 없는 김백희,
플라토닉 사랑을 했다는 임학복이 있다.
첫사랑을 한 뒤 장가를 들었기에 이후에 한 사랑은 모두 불륜이라는 이야기인데 그의 부인이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싶다. 하지만 그의 부인인 서온순은 이름만큼이나 온순해서인지 남편의 염문에도 내색한번하지 않았더란다. 여튼,
<맨 왼쪽 이상화 맨 오른쪽 이상화의 형 이상정>
이런 경험이 이상화의 작품의 배경이나 감정의 선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화 시인 가족 맨왼쪽 이상화 맨 오른쪽 부인 서 온순>
사랑하라!
사랑하면 변화하게 되고 변화하면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필자도 사랑을 많이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관련 홈페이지 - http://www.sanghwa.or.kr/
참고 – 대구의 문화인물1 (2006.대구광역시)
사진 – 구글 검색(시인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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