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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62.08.05 - 화련한 인생 뒤 아픔을 가진 배우 마릴린 먼로 사망

아름다운 금발의 매력으로 세계적인 섹시 디바로 사랑받았지만
누구보다 외로웠고 누구보다 사랑이 고팠던 마지막까지 쓸쓸한 생을 살다간 마릴린 먼로

세상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강했고 모든 여자들처럼 자신만의 모습으로 우뚝 서고자 했던 마릴린 먼로

고아 소녀스타가 되기까지
가장 화려한 스타였으나, 한편으로 가장 불행한 여인이기도 했던 마릴린 먼로는 그 출생부터가 비극적이었습니다.
1926년 6월 1일 먼로는 어머니 글래디스 펄 베이커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의 이름은 노마 진이었습니다.
출생신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버지 마틴 E. 모텐슨은 친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실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직장 동료였던 스탠리 기포드.
훗날 먼로는 여러 번 친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딸을 만나기를 꺼려했습니다.
어린 시절 직장에 다니던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딸을 맡기고 가끔 들러서 그녀를 만나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노마 진은 심한 애정결핍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수용된 뒤에는 어머니의 친구 집에서 생활하다가 고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노마 진은 군수공장에서 일하다가 1945년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버를 만나 모델과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영광 속에 숨어 있는 파멸
영화배우로서는 승승장구했지만, 그녀의 영광 속에는 늘 파멸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1956년 7월 1일 유대인 극작가 아서 밀러와 혼인하지만, 5년 만에 파경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녀는 과학자 아인슈타인, 가수 프랭크 시네트라와 이브 몽탕,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 형제와의 염문설. 이러한 화려한 연애 속에는 어쩌면 애정결핍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노마 진의 어린 시절에 대해 페미니스트 안드레아 드워킨은 마릴린 먼로의 <마이 스토리> 서문에서 “이 어린 여자아이에 비하면 문학에 등장하는 불우한 어린 주인공들은 상황이 꽤 좋았던 셈이다. 디킨스도 이렇게 강하고 재치 있고 무지하고 가엾은 아이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드워킨은 또 마릴린 먼로의 남자들에 대해 그들이 “그녀의 찢어지고 곪은 상처에 소금을 대고 문질렀다”고 말했습니다.
섹스 심벌로서의 먼로의 이미지는 어쩌면 남성 판타지가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먼로를 유명하게 했지만, 그것이 또한 그녀를 불행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마릴린 먼로 하면 ‘섹스 심벌’이라는 말과 ‘백치미’의 여인을 떠올립니다.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치마를 펄럭이며 천진하게 웃는 모습,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도발적인 입술, 반쯤 감은 눈, 출렁거리는 금발 미인, 그것이 우리가 떠올리는 먼로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의 이면에서 그녀는 모순된 우리 사회에 대해 상당한 깊이의 문제의식을 가진 배우였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 전시된 ‘포에버 마릴린(Forever Marilyn)’ 조각상. 오는 8월 5일은 먼로가 사망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내 삶에는 키스나 약속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외롭다는 생각에 죽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몽상하면서 기분을 바꾸어 보려 했다.
다른 아이들이 사랑받는 것처럼 누군가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상상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주의를 끌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꿈꾸는 정도로 타협했다. 
           
- 마릴린 먼로 My story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