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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492. 04. 17 - 스페인, 콜럼버스 항해 계약

 

이탈리아 출신의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84년 포르투갈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지원요청을 허락하지 않았고,
콜럼버스는 자신의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에스파냐로 향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는 부부로써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때 마침,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 2세는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기 위해  해외 진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을 찾아가

1.기사와 제독 작위
2.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부왕의 지위
3.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일

이라는 조건을 제시하며 자신을 후원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러한 파격적인 요청 때문에 포르투갈에서와 마찬가지로 콜럼버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하지만 포르투갈교회에 대한 경쟁 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를 개척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당시 스페인 교회의 성직자들은 콜럼버스를 대신해 이사벨 여왕을 설득했고, 결국 여왕은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선박 2척을 지원하는 한편,
항해에 참석하는 죄수들은 그 죄를 면죄한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다.
또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현재의 바하마제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죽을 때 까지 자신이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어,
그 지역 원주민들에게 '인디언'이라 이름을 붙인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의 서회항로 발견으로 인하여 아메리카 대륙이 비로소 유럽인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현재의 미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대가 생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되어진다.
하지만 그의 신대륙 발견 이후 일부 유럽인들의 침략적인 행위로 원주민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가 탐험을 시작한 것은 당대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중요한 사명인 기독교의 전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탐구심이 아닌
각종 향신료의 수입을 위한 인도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금과 보물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실제로 그의 항해일지를 보면 금과 보물에 대한 언급이 10일 분량에 수백 차례나 등장한다.
또한 이사벨 여왕과의 계약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의 축적이었다.
그는 총 4차례나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하였는데, 아메리카에 상륙한 것은 그 가운데 제1항해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