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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91.4.26- 학생운동가 강경대 사망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1991년 명지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민중노래패 '땅의 사람들' 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91년 이전, 호헌철폐 및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던 학생운동 세력은 실제 이를 성취한 후, 더욱 급진적인 노선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후 학생운동은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비롯한 학내 투쟁을 사회 변혁운동의 전진기지로 삼기 시작했다. 초기에 학내에서 시위를 하던 학내 투쟁이 주요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노태우정권을 비롯한 보수세력이 여전히 건재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한 상황이 되었다. 학생운동 세력은 이러한 상황에서 잘못된 정세판단으로 인해, 보다 과격한 투쟁이 변혁의 열쇠임으로 판단하고 급진화/과격화 한다.

학생운동의 급진성으로 말미암아, 등록금 인상 반대 등 학내 문제 해결을 주장하면서도, 학교 밖으로 진출해 불법으로 도로를 점거해 경찰과 가두투쟁을 하고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는 방식이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당시 백골단을 비롯한 폭력진압의 수위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고, 공안정국으로 학생운동을 탄압한 것이 급진화의 빌미를 주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학생운동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가두투쟁 중심이었다. 게다가 엄숙주의가 혼재하여 준 군사조직화 하는 결과를 낳았다.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1991년3월 22일 명지대 등록금 인하 주장을 하며 도로를 불법점거하고 화염병 투척 시위를 벌이다, 이를 추적해 학교 내에 진입한 경찰의 최루탄에 의해 안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1991년 4월 24일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광철이 등록금 인하를 주장하며 연세대학교 집회에 참석한 후 학교로 돌아오던 도중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리고 등록금 인하 시위 중, 시위대의 퇴로 확보 및 도주를 위한 정찰조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백골단이라 불리는 사복 경찰관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시위 진압을 시작하자, 강경대는 학교 쪽으로 도망치기 위해 1.5m 높이의 담벽을 넘으려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쇠파이프로 두들겨 맞은 뒤 그대로 방치되었다. 이러한 광경은 곧 다른 학생들에게 목격되어 이들에 의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한 시간 만에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1991년 한 해동안 민주화운동의 시위 중 사망한 최초의 학생이 된다.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5월 14일 명지대학교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영결식을 끝내고 운구행렬은 서울특별시청으로 이동하여 노제를 지내려고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인해 이동하지 못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5월 18일 노제 장소를 서울역으로 옮기고 영결식을 다시 진행하였으나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서 또 다시 경찰의 저지에 의해 결국 공덕동에서 노제를 지냈다. 우여곡절 끝에 5월 20일 광주 망월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자료출처- 네이버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