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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32.04.29 - 윤봉길의사 의거

1932년 4월 29일,
일본은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상하이를 점령한 뒤 전승기념 및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거행하였다. 이때 비밀항일결사인 한인애국단 단원인 윤봉길이 사열대 위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요인을 폭살시켰다. 김구의 명령을 받은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은 폭탄장치를 한 물통과 도시락을 들고 일본인으로 가장, 식장에 들어가 오전 11시 40분경 참석자 전원이 묵도하는 시간에 폭탄을 던졌다.

의거 직후 홍커우 공원의 모습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사령관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즉사하고, 해군 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한쪽 눈을 실명, 주중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한국독립운동계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또한 이 거사는 
일제를 크게 자극하였고, 일본 관헌은 한국 교포들의 근거지에 난입하여 사건과 무관한 안창호 등 11명을 검거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을 받아오던 중국인들을 열광시켰고, 그들에게 한국독립운동을 새롭게 인식시켜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게 하였다. 만보산 사건으로 한때 악화되었던 중국 거류 한국인과 중국 관민과의 감정이 호전되고, 교포에 대한 중국인의 환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임시정부는 중국정부로부터 후대를 받게 되었다.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격찬하였다.

의거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윤봉길은 자폭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군에 붙잡혀서 일본 대판(大阪)에 이송되어 위수형무소에서 12월 18일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의거 직후 일 군경에게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 거사 직후인 1932년 4월 30일 North China Daily에 실렸다.

윤봉길(尹奉吉, 1908. 6. 21~1932. 12. 19)(이미지출처: 네이버이미지)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19살 소년.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의사는 당시 민족잡지인 [개벽]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 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의사의 나이는 19세였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히 계몽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개혁을 실시하여 갔다. 주된 사업은 농가부업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爲親稧), 수암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의사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독립의 뜻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다.
드디어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의사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이 바로 의사였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간 일한 것만 보아도 그 인격의 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1931년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소원하던 조국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백범 선생과 의사는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에 접하게 된다. 얼마나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의사였다. 의사와 백범 선생은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의거를 결행하였다.

 

1931년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 오른쪽은 선언문 사본

 

1932년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피체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 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는데, 이 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의사는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유언은 의사가 참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띄우는 당부일지도 모른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자료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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