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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857. 05. 10- 인도에서 세포이항쟁이 일어나다

 

세포이 항쟁은 1857년 5월 10일 영국 동인도회사의 세포이 용병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영 항쟁이다. 세포이 반란, 1857년 인도 항쟁, 제1차 인도 독립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이 명칭들 가운데 반란이란 것은 다분히 영국측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인도인의 입장에서는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세포이 항쟁은 빠른 속도로 인도 각지에 확산되어 각계 각층이 영국에 대항하는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주요 교전은 주로 겐지스 강 상류 삼림 지역과 인도 중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인도의 행정 구역으로 보면 우타르프라데시 주, 비하르 주, 마디아프라데시 주 북부, 그리고 델리 등지에서 교전이 있었다. 항쟁은 동인도 회사의 종교에 대한 몰이해에서 촉발되었다. 1858년 6월 20일 과리오르가 함락되면서 세포이 항쟁은 절정을 맞았다. 세포이 항쟁은 이후 1947년까지 지속된 인도 독립 운동의 시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세포이 항쟁은 인도 전역을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항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벵골, 뭄바이, 마드라스와 같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펀자브의 시크교 제후는 오히려 동인도 회사를 지지하여 병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하이데라바드, 마이소르, 트라반코르, 카시미르, 라즈푸탄과 같은 다른 많은 지역의 토후국들은 항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한편, 아와드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항쟁이 유럽 국가 전체에 대한 배격운동 양상을 띄었다. 락슈미 바이와 같은 항쟁의 지도자들은 항쟁 이후에도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세포이 항쟁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일관적인 이념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세포이 항쟁으로 인해 영국 동인도 회사는 해체되었고 영국은 인도에 대한 지배를 위해 군사, 재정, 행정 등 각 분야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영국령 인도 제국을 출범시켜 정부 직할로 편재하였다. 이로서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제국의 군주라는 새로운 지위를 더하게 되었다.

세포이 항쟁은 인종, 종교, 카스트의 구별 없이 광범위한 계층이 규합된 최초의 반영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인도 독립운동사에서 의의를 가진다.

[자료출처] 네이버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