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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27. 05. 11 신소설 작가 이해조 / 2004. 05. 11 시인 구상 세상 떠남

이해조 [李海朝, 1869~1927]

 

어려서 한문 공부를 하여 진사 시험에도 합격했으나 신학문에 관심을 두어 

고향인 포천에 청성제일학교(靑城第一學校)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활쏘기와 거문고 타기가 취미였으며, 특히 국악에 조예가 깊었다.


1906년 11월부터 잡지 ≪소년한반도 少年韓半島≫에 

소설 <잠상태 岑上苔>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로 양반가정 여인들의 구속적인 생활을 해방시키려는 의도로 실화(實話)에 근거하여 소설을 썼다.


1907년 대한협회(大韓協會)와 1908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등의 사회단체에 가담하여 

신학문의 소개와 민중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하였고, 

한때 ≪매일신보≫ 등의 언론기관에도 관계하면서 30여 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문학적 업적은 크게 작품을 통하여 이룩한 소설적 성과와 

번안·번역을 통한 외국작품의 소개, 그리고 단편적으로 드러난 근대적인 문학관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창작소설을 중심으로 볼 때 <자유종 自由鐘>(1910)은 

봉건제도에 비판을 가한 정치적 개혁의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풍속의 개량 등 개화의식이 두드러져 있다. 

형식면에서는 토론소설로서 새로운 신소설의 양식을 시도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작첩·계모형의 가정비극적 주제를 보여주는 <빈상설 鬢上雪>(1908)·<춘외춘 春外春>(1912)·<구의산 九疑山>(1912)이나, 

미신타파를 내세운 <구마검 驅魔劍>(1908),

 일반적인 남녀이합(男女離合)에 중점을 둔 <화세계 花世界>(1911)·<원앙도 鴛鴦圖>(1911)·<봉선화 鳳仙花>(1913) 등의

많은 작품이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봉건 부패 관료에 대한 비판, 여권신장, 신교육, 개가 문제, 미신타파 등의 새로운 근대적 의식과 

계몽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고대소설의 전통적인 구조를 기본바탕으로 엮어나간 전형적인 신소설들이다.


이들은 모두 당시 사회현실을 절실하게 부각시키지 못한 결점은 있으나 

개화기라는 역사적 상황을 개인적인 체험 세계 안에서 비교적 포괄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한편, <화(花)의 혈(血)>·<탄금대 彈琴臺>의 후기 등에서 보이는 현실주의적인 소설관과 <화의 혈> 후기에서 ‘빙공착

영(憑空捉影 : 허공에 의지해 그림자를 잡다.)’으로 표현한 소설의 허구성에 대한 인식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소설의 사회계몽이라는 도덕적 기능과 오락적 기능에 대한 동시적 인식 등은 

최초의 근대적인 문학관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 밖에 베르느(Verne,J.)의 <철세계 鐵世界>(1908) 및 <화성돈전 華盛頓傳>(1908) 등의 번안 소개, 

그리고 <춘향전>·<심청전>·<흥부전>·<별주부전> 등의 판소리계 소설을 각각 

<옥중화 獄中花>(1912)·<강상련 江上蓮>(1912)·<연(燕)의 각(脚)>(1913)·<토(兎)의 간(肝)> 등으로 개작한 것도 

그의 문학적 공로이다.


그 밖에도 <모란병>(1911)·<우중행인>(1913)·<소학령>(1913)·<비파성>(1913)·<홍도화>(1910) 등 

신소설 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신소설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소설은 구어체의 특징과 인물·성격의 사실적 묘사, 기자 생활에서 오는 보고체 문장 의식 등이 두드러진다.

 특히 고전소설의 구조적 특징과 이념형 인간들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근대적 사상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이인직(李人稙)과 더불어 신소설 확립에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출처 - 네이버 지식사전 '이해조')


  



구상(具常, 1919년 9월 16일 ~ 2004년 5월 11일)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소년기의 대부분은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보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1938년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하고 

1941년 니혼 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했다.


이후 귀국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해방후 원산의 작가동맹에서 펴낸 시집《응향》에 자신의 시를 실었으나, 

1946년 응향 사건이 발생하여 북조선 당국으로부터 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월남했다.

 이후 언론계에 투신하였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제자들에게 사회에 올바름이 없더라도, 기독교인은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만큼 

올바름에 대한 올곧은 추구를 중요하게 생각한 구상 시인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언론 운동을 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지만 곧 무죄로 풀려났다.


그 뒤로는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언론과 문학활동에만 몰두하였다. 

4·19 혁명 이후 그의 반독재 경력을 높이 산 민주당 정권과 

5·16 군사정변 이후 종군기자 시절부터 친분을 쌓은 박정희가 정계입문을 권하기도 했으나 거절하였다. 

미국 하와이 대학교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가 이중섭, 걸레스님 중광, 장애인 화가 김기창, 시인 고은등 다양한 방면의 예술가와 교류하였다. 

2004년에 지병인 폐병과 교통사고 후유증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천주교 공원묘지이다.

그의 작품은 주로 가톨릭 신앙에 바탕한 것으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프랑스 문인협회에서 선정한 세계 200대 시인에 들기도 하였다.


(출처 - 향토문화 대전 '칠곡 근현대 인물 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