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57. 05. 29 - 이효정 여사 한국인 최초 나이팅 게일 기장 수여

1957. 05. 29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

 

  F.나이팅게일이 상병자의 간호개선을 위하여 이룩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7년 영국 런던의 제8차 적십자국제회의에서 헝가리 적십자사가 간호활동에 현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에게 국제적인 기념 메달을 수여할 수 있도록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금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각국 대표들의 지지를 받게 되어 1912년 제9차 적십자국제회의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었으며, 각국 적십자사의 기부에 의하여 기금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수상이 지연되어 오다가 종전과 더불어 세계정세가 안정되면서 1920년 나이팅게일 탄생일인 5월 1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나이팅게일기장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이 해는 나이팅게일 탄생 100주년이 되어 의의가 있었다. 이 기장은 전시 또는 평시에 상병자나 환자를 간호하는 데 공로가 있거나, 전시근무 중 사망한 정규간호원 또는 적십자에 등록한 간호보조봉사원을 대상으로 수여한다. 적십자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for the Red Cross:ICRC)는 각국 적십자사로부터 추천을 받은 후보자 중에서 수상자를 결정하며, 수상자 결정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입장을 유지하고 선발하며, 나이팅게일 탄생일인 5월 12일 회람을 각국 적십자사에 발송하고 기장수상 결정자의 명단과 기장 및 훈기를 송부한다.

 

  이 기장은 은도금된 메달로서, 그 표면에는 나이팅게일 초상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념’이라는 문구가, 그리고 이면 주변에는 ‘박애의 공덕을 찬양하고 이를 영원히 전한다’라고 새겨지고, 그 중앙에는 수상자의 성명과 수여일자가 새겨진다. 1995년 현재 전세계적으로 1,105명의 수상자가 배출되었으며, 한국은 1957년 제16차 나이팅게일 기장 수여시에 이효정 여사가 최초로 영예를 얻은 이후 1995년까지 36명의 수상자가 배출되었다.[네이버 지식 백과]

 

이효정 여사 생애

 

  일제강점기 활동1913년 경북 봉화군에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성부로 올라와 1930년대 초 경성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효정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 나가 만세를 부르고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으며, 3학년 때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졸업 후에는 이재유등이 지도하는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9월 21일,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에서 파업투쟁이 일어나자, 그녀는 이재유의 지도를 받아 여성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총파업을 지도하였다. 노동쟁의의 확대를 꾀해 공장 내 조직의 확대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계획 하에 파업투쟁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종방 파업투쟁 이후 1933년 10월 17일 청량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5년 11월, 이효정은 경성에서 이재유·권우성 등이 주도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이효정은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를 받다가 '교원노조 사건'으로 2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는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박두복과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돌아간다. 시댁인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했으며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광복이후해방 이후 이효정은 울산지부에서 건국준비위원회에 활동하였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울산 대의원으로 활동하다 훗날 '남로당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기도 했던 남편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는 일이 벌어지고, 자녀 2남 1녀와 함께 남한에 남겨진 이효정은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혀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남편이 남파간첩으로 활동하다가 거듭 월북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고, 다시 요시찰인물이 된 그녀는 수시로 사찰기관에 연행돼 고문과 취조를 당하게 된다. 영장 없이 끌려가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고 고문으로 팔목이 부러지는 장애를 입으면서 억울한 옥살이도 감수해야 했다. 1980년대 '6.10 민주항쟁'으로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지자 이효정에 대한 사찰도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노년에 이효정은 시집을 출간하는 등 문학인으로 지냈다.

  2006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이뤄지면서 93세 나이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포장 수여받았다. 2010년 8월 14일 타계했다.

[네이버 지식 백과]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 이효정 여사>

 

ⓒUtokpia_Ad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