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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01. 05. 28 - 이재수의 난 발생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천주교도의 행패에 맞서 이재수와 오대현이 이끈 민란으로 700여명이 숨진 사건이다.

1858년 제주도에 가톨릭이 전래되기 시작하였고, 99년 프랑스의 페이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파견되면서 본격적인 전교가 이루어졌다. 그 뒤 1900년 라쿨, 무세 신부가 들어오면서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때 강봉헌이 제주도 봉세관으로 부임하면서 온갖 잡세를 부당하게 징수하였고, 이러한 일에 가톨릭교도들을 채용하였다. 또한 교회가 부지를 매입하면서 신목, 신당을 없애는 등 제주도민의 문화를 무시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도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다.

이에 대정군수 채구석과 유림오대현은 '상무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봉세관과 교회에 대항하였다. 관노 이재수 등과 도민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입수한 무기로 무장하여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라쿨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함대에 도움을 청하여 6월 1일 제주에 도착했으나 이미 제주성은 함락되었고 가톨릭교도 500여 명이 처형당한 뒤였다. 그 후 정부에서 파견한 강화진위대에 의해 진압, 채구석을 제외한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 등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나머지 주동자들은 징역에 처해졌다.

이 민란은 피살된 교인들의 매장지 문제, 프랑스인 재산의 손해 배상 문제 등으로 3년 뒤에야 수습되었다.

이재수는 관노또는 마부였다고 한다. 1901년 대정군 인성리에서 주민과 천주교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주민 대표로 자진 참가하여 봉세관의 토색(討索)과 천주교도의 행패를 성토하고 고발하였다.

같은 해 5월 주민과 천주교도의 충돌로 민란이 일어나자 민군의 주장이 되어 민란을 지휘하였다. 이재수는 정부군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교수형이 확정되어 처형당했다.



'이재수의 난'은 1999년 박광수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