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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경영] 기업윤리의 진정한 의미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위해 경영활동을 한다' 경영학의 대표적 명제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경영은 '맹목적 이윤추구가 선이다.'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도 이윤추구를 위해 범법을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에따라, 산업화의 물살에서 여러 범죄들이 눈감아 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지나친 이익의 극대화를 중시하는 미국의 경영폐해를 그대로 배워 한국사회에 실현시킨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어느정도의 기술발달과 살만한 세상을 이루어내자 국제적으로 환경에 대한 아젠다가 형성이되고 현대의 이윤 개념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시장경제는 기술의 무한 발달로 인해 제품간의 우위가 크게 차이나지 않고 '브랜드가치'나 '개인선호도'에 따라 선택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로인해 기업이 추구.. 더보기
[인물] 코오롱 창업주. 대구섬유산업의 풍운아 코오롱 그룹 창업주 이원만 "공명정대하게 살자" 公明正大[공명정대] :마음이 공평(公平)하고 사심(私心)이 없으며 밝고 큼. 국내에서 손꼽히는 기업 중 하나인 코오롱그룹의 초대 창업주 이원만회장의 경영방침이다. 대구지역에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과 함께 대구 섬유산업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걸출한 인물로 1904년 영일군에서 태어났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거쳐 아사히공예사를 설립해 큰 돈을 벌고, 18살에 낳은 장남 이동찬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해방 후인 1947년 직물공장이었던 경북기업을 인수하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며 한국 최초로 나이롱을 생산한 코오롱의 첫발을 디디게 된다. 1954년 삼성그룹의 발판이 된 제일모직이 창업하며 경쟁하기 시작했고, 57년 한국 최초로 나일론을 독점 .. 더보기
[사회]박근혜 '아킬레스건', 장준하는 누구? 김일성, 김대중, 전태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당대 혹은 후대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라이벌로 꼽힌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김일성과 김대중은 박 전 대통령의 생전에 라이벌로 거론됐고,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박정희식 산업화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의 라이벌로 후대에 꼽힌 인물입니다. 여기에서 빠뜨리기 어려운 사람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장준하입니다.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서 박정희의 독재를 비판한 장준하는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서 철권통치를 하던 박 전 대통령에게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장준하는 박 전 대통령과 한창 대립각을 세우던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로부터 37년. 장준하 타살 의혹이 다시 부각되고 있습니다. '친일'과 '독재'라는 박정희의 아킬.. 더보기
1974. 07. 13 - 비상보통군법회의, 민청학련 7명 사형 7명 무기 선고 민청학련 사건(民靑學聯事件)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事件)의 줄임말이다. 1974년 4월,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시국사건을 말한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의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사건이다. 1972년 12월27일에 있었던 “유신 체제 발족”과 1973년 8월 8일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반발심을 환기하였으며, 1973년 10월부터 시위 등을 통한 박정희 정부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 반대 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 4월 초에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유신 반대투쟁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은 그 배후로 `인.. 더보기
1970. 07. 07 - 경부고속도로 개통 현재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알려진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7월7일에 완공되고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1964년 12월에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며 첫 구상을 한 뒤 귀국해서도 틈만 나면 인터체인지 선형을 직접 그려가며 꿈을 가다듬었다. 1967년 4월에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아직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재정파탄이 날 것이다”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육군의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정식 기공일자는 1968년 2월 1일이지만 이미 서울∼오산 간 공사를 3개월 전부터 진행할 정도로 설.. 더보기
1980. 05. 18 - 5.18 민주화 운동 발발 ‘박정희 시대’ 18년의 종말과 민주주의의 여명 1961년 5월 16일, 군부가 무력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권을 찬탈한 군부의 중심엔 일제 강점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동 군소위로 임관한 경력을 지닌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 값싼 노동력과 농어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수출 중심의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으로 개발독재가 이뤄졌다. 이는 정치·경제·사회분야의 수많은 불균형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국민들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을 통해 군사독재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폭압성을 더해가던 군사독재는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쳤다. 결국 그로부터 열흘 뒤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