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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 '실패=사회적 사형선고'가 범죄 불러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 '실패=사회적 사형선고'가 범죄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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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야수'가 됐나
의정부·여의도 사건 범인 직장 잃고 친구도 없어… 경쟁 밀리면 복귀 불가능
독거세대가 4분의 1… 전통 가족체제 무너지며 가정도 사회도 의지 안 돼


최근 잇따라 발생한 무차별 범죄의 범인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직장이 없거나 가족관계가 소원한 사회적 소외계층이다. 물론 극악한 범죄행위는 범죄자 개인의 인성이 주요한 변수지만 사회적 환경을 간과할 수 없다. 학교부적응 실직 빈곤에 빠진 낙오자가 제도에 의해 구제받지 못하고, 마지막 보루인 가족의 보살핌마저 끊기면서 범죄의 나락에 빠져드는 것이다.

지난 18일 침을 뱉었다는 이유로 벌어진 승객과의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돼 지하철 안과 승강장을 오가며 승객 등 8명에게 칼부림을 한 범인 유모(39)씨의 개인적 환경을 보자. 경기 연천군이 고향인 유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자퇴했다. 부모는 가난했고, 유씨는 단순 일용직을 전전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160㎝이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왜소한 체격으로 또래들에게 따돌림 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10여 년 전부터는 집을 나와 주로 서울의 여관을 옮겨 다니며 공사장, 식당, 봉제공장 등에서 일했다. 기댈 데가 없었다. 형제들과 연락을 끊었고, 친구도 없었다. 그 흔한 휴대폰도 사지 않았다. "전화할 사람이 없다"는 게 이유다. 하루 밥벌이를 위해 떠돌던 유씨는 최근 한 달 정도 아예 일거리가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의정부에도 일자리를 찾으러 간 길이었다. 검거 당시 유씨의 재산은 지갑에 든 현금 3만원이 전부였다. 가족관계가 사실상 끊어진 상태에서 그 누구로부터도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간 사소한 잘못으로도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없었던 유씨가 아무한테나 칼을 휘두르는 반사회적 인간화한 끔찍한 변화를 단순히 인성과 개인의 범죄본능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패자부활전 없는 사회

문제는 이런 사회적 복수를 결심하는 사람이 경쟁적 사회구조에서 점점 늘고 있다는 데 있다.

 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경쟁에서 밀려났을 때 복귀 희망이 없기 때문에 자포자기하게 된다"며 "이런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사회ㆍ경제의 안정성 측면에서 봤을 때 엄청난 적신호"라고 분석했다.

빈약한 사회안전망

전문가들은 사회안전망이 빈약한 한국사회에서는 사회ㆍ경제적 실패는 개인에게 사형선고와 같다고 지적한다.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과 교수는 "과거에는 가족이 품어줬지만 지금은 독거세대가 전체의 4분의 1에 달할 정도로 전통적 가족체제가 붕괴됐다"며 "사회에서 퇴출당했을 때 절망감이나 공포감이 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 교수는 "홀로 고립된 상황에서는 왜곡된 인식을 교정할 기회마저 잃게 돼 범죄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쟁구조 속에 좌절의 만성화

최근 불고 있는 힐링열풍도 무한경쟁의 사회구조 속에 사회적 스트레스 상황이 만연해 있다는 방증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정혜신 정신과 의사는 "좌절의 만성화와 과도한 사회적 스트레스 상황이 계속될 경우 개인에게 나타나는 신호가 공격성 또는 무력감"이라며 "사회의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이런 신호를 보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회적 실패를 겪은 사람들에게 대안을 마련해 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무차별 범죄가 사회적 현상처럼 돼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