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이다. 그는 술을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그 일화들을 몇 가지 소개한다.
- 빙허 선생은 이 집에서 생계를 위해 닭을 쳤었다. 그가 자주 어울려 다녔던 문인들은 오가는 길에 양계사업을 하던 현진건의 부암동 집에 들러 달걀요리에 병든 닭을 잡아 안주삼아 밥
삼아 술을 마셨다. 애초에는 양계 백수로 근근히 호구지책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고 하지만 울적한 빙허를 찾아오는 술친구들의 토색장으로 닭 머리가 점점 줄어들어 난경에 빠지
게 되었다.
(생계를 위해 했던 양계가 술의 안주로 이용되어 생계에 곤란함이 생김)
- 어느날 아침이었다. 어제 마신 술이 채 깨지 않고 출근길에 나선 현진건이 치통집을 들렀다.
현진건의 취한 목소리가 들리자 치통집 주모들은 모두 부엌에다가 신발을 감춘 채 다락으로 숨었다.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자 현진건은 가게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현진건이 이리저리 무엇을 찾다가 문득 부엌문을 열자 거기에 여인네 신발이 몇 켤레 있더란다.
현진건은 주모들이 신발을 숨기고 어디론가 숨었다는 낌새를 알아채고 신발을 모두 주워서 우물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현진건은 사무실로 유유히 출근을 했던 것이다.
당시 귀했던 고무신을 잃어버린 주모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거룻배만한 짚신을 신고 동아일보 현진건 사무실까지 찾아와 신발을 물어내라고 난장을 부렸고, 마지못해 현진건은 직원
몇몇과 우물물을 다 퍼내고 신발을 찾아주었다.<주호 현진건의 추억.1954년 8월>
(요약 - 출근길에 술을 마시려 술집에 들렀으나 주모들이 숨어버림 화나서 신발을 우물에 던졌다가 주모들이 물어내라하자 우물을 퍼서 찾아줌)
- 빙허, 십윤, 도향, 그리고 몇 사람이 선술집 순례를 시작하는데, 차를 타고 서울역 앞에 있는 주점까지 나가서 술 먹기 시작한 것이 거리에선 술집이 있는 족족 들려서 너비아니를 굽고,
왜콩을 까면서 종로를 거쳐서 동대문까지, 동대문 밖에서 다시 종로까지 오는 동안에 술 먹은 잔 수가 도향이 곱빼기로 70사발, 빙허가 60사발, 십윤이 40사발을 마셨다고 한다.
(요약 - 술집을 순례하면서 서울역에서 동대문 갔다가 다시 종로로 와서 술을 마심)
- 현진건이 동아일보에 입사한 후의 일로
이무영은 ‘인촌과 빙허 현진건’(‘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년, 184~187쪽)에서 당시 사장이 인촌 김성수라고 기술해 놓았으나 우승규 전 편집국장은 1982년 9월 30
일 인터뷰에서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던 현진건이 하루는 술에 취해서 대낮에 사장실 옆 복도에서 송진우 사장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사장이 술 한번 안샀다고 주정을 했다함) 고
하가 허~ 웃으면서 ‘이사람 취했구먼, 혀가 만발이나 빠질 친구야. 백주 대낮에 술을 먹고 사장 뺨을 치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고서는 인력거를 태워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다음
날 현진건은 기고만장해서 회사로 출근했는데 송 사장은 그러한 기백을 좋아했다고 한다.
(요약 - 사장을 술 한번 안산다고 뺨을 때림. 사람들이 이제 짤렸다고 생각했는데 사장이 쿨 하게 그를 용서해줌)
위의 이야기로 보아 기백 좋은 남자가 술을 엄청 좋아했다고 단순히 생각 할 수도 있겠다. 얼마나 술을 좋아했으면 ‘술 권하는 사회’라는 소설까지 썼을까 싶다.
하지만 그가 쓴 ‘술권하는 사회’라는 소설을 보면 식민지 시대의 소극적이고 비참한 지식인의 모습과 안타깝기 그지없는 나라 현실에 대한 슬픔이 전해진다.
그가 술을 마신 이유는 술을 좋아하기 보단 일제치하 당시 지식인으로써 감당해야 할 부담과 걱정이 아닐까 한다.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술로 풀었는지 모른다.
또 그의 사상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시인 백기만에 따르면 현진건은 浮雲散而影不留 殘燭盡而光自滅(부운산이영불유 잔촉진이광자멸)이라는 화엄경 구절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는 ‘뜬 구름이 흩어지니 그림자도 남지 않고, 조금 남은 촛불 다하니 스스로 빛이 없어지네’라는 뜻으로 인생무상을 이야기 하고 있다.
백기만도 현진건이 공허관과 염세 사상을 지녔다고 이야기 했다. 그의 호 또한 빙허(憑-기댈 빙, 虛- 빈 허)로 공사상과 함께한다.
삶에 대한 공허함과 세상에 대한 짜증을 또 술로 덮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그냥 주당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진 주당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그는 술을 안했을 때는 매우 얌전하고 말이 없고 너무 점잖아서 동네 사람들이 감히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고 하며, 불편이 있으면 주정을 했다고 한다. - 이재민(새 자료로 본 빙허의 생애)>
그러다 미두(米豆-미곡의 시세를 이용하여 현물이 없이 투기적 약속으로만 팔고 사는 일) 사업 실패로 파산하고 만다.
그리고 장편 ‘선화공주’, 단편‘현진건 단편선’을 간행하고 1943년 술로 인한 장결핵으로 4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된다.
문학사와 사회에 흔적을 남겼던 현진건의 삶을 돌아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안타깝게도 그의 생가는 터만 남아있다.
<현진건 생가 철거 전>
<현진건 생가 철거 후, 사진 출처 - 황평우.2003.11.27.오마이 뉴스>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325-2에 위치한 현진건 생가 철거는 현진건 생가에 대한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발생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미 1994년과 1999년에 문화재 지정을 검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문화적 가치가 없다며 승인되지 못했다. 왜 문화재적 가치가 없단 말인가?
작가가 남기는건 문학 작품 밖에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서 일까, 주변환경과 작가의 삶의 흔적이 있는 것 또한 문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일까.
예술가들이 작품을 남기는데 필요한 공간이 있을 것이고 그 공간엔 예술가의 정신과 삶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또 그 환경이 예술작품에 녹아있을 것은 누구나 추측하능 한 일이다.
해외의 예술가들의 경우 사후 그들이 살았던 생가나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서 보존되고 있다. 우리와는 대조적이다. 생가와 같이 큰 건물이나 유적은 박물관으로 갈 수 없다.
보존하고 그 가치를 조명해서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기억 되어야 할 문화이다. 이런 점을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문학인의 생가가 개인의 소유라는 명분아래 무참히 없어진 것은 문화적 정신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 Utokpia_Ad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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