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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94. 07. 08. 김일성 북한 주석 사망

북한 주석 김일성이 1994년 7월 8일 사망했습다. 북한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9일 낮 12시 특별방송을 통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꼐서 1994년 7월 8일 오전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오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고 발표했다. 북한방송들은 김일성의 사망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를 발표 "심장혈관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다 겹쌓이는 과로로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금수산의사당(주석궁)에 안치하며 장례식은 17일 평양시에서 거행한다고 발표했다. 8일부터 17일까지는 애도기간으로 정했다.

1912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45년 소련군과 함께 진주해 49년 동안 북한을 통치해 온 김일성은 사회주의 건설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건설한 나라는 현대 문명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인 우상국가였다. 그가 민족에 저지른 최고의 죄악은 6.25였다.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의 가슴에 총격을 가한 6.25는 민족분단을 불치의 것으로 만들었다. 김일성은 폭력에 의한 내부권력을 유지하는 한편 남한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테러를 자행해 아웅산폭파사건이나 KAL기 폭파 사건 등을 저질렀다.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였으나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김일성으로 바꾸었다. 1919년 7세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어린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1923~24년에 부모의 뜻에 따라 혼자 평양으로 돌아와 외가가 있는 칠골의 창덕학교에 다녔다.

김일성의 항일운동 경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남한의 관변문헌과 북한문헌들의 서술은 대조적인데, 북한의 문헌들은 그의 활동을 사실 이상으로 미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최근 그와 관련된 일제관헌자료가 상당수 발굴되고 중국측 자료도 공개되고 있어서 어느 정도 객관적인 활동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북한문헌들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26년 10월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면서부터였다고 밝히고 있다. 1927년 그는 지린[吉林]에 있는 유원[毓文] 중학교에 입학하여 '조선공산주의자청년동맹'을 조직했다. 당시 그의 활동에 관한 최초의 일제관헌자료에는 그가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주요 인물이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1929년 가을 반일공산주의활동 중 중국 군벌에 체포되어 수개월간 감옥살이를 했고 유원중학에서 퇴학당했다. 그가 본격적인 반일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부터였다. 북한문헌들은 1930년 여름 그가 지린 성 이통 현 고유수에서 조선혁명군을 결성했으며 곧이어 창춘 현[長春縣] 카륜 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주체적인 혁명노선을 제시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확인되고 있지 않다.

그가 일제에 무력으로 대항한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든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동북(만주) 각지에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 항일유격대를 조직했는데, 그도 1932년 4월 25일 안도 현에서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반일인민유격대'를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속해 있던 동만(東滿:당시 간도지방)의 항일유격대가 확대·발전하여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북한의 표현으로는 '조선인민혁명군')로 개편되자 그는 그해 가을부터 제3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거쳐 1936년 3월 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의 일환으로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재조직되면서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곧이어 1936년 7월 또 한번의 편제개편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으며, 1936년 5월 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위한 조국광복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1937년 6월 그가 지휘하는 6사 병력 100여 명이 조국광복회 국내 지하조직과 연합하여 함경남도 갑산군의 보천보를 공격하기도 했다. 1938년 12월 일제의 가혹한 토벌이 계속되는 가운데 부대편제의 개편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을 맡았다. 제2방면군 군장시절 홍기하(紅旗河) 전투(1940. 3) 등 일본군과의 여러 차례의 대규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1939년말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항일군에 대한 대토벌로 항일연군은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군 토벌대가 김일성부대를 주요 목표로 집요하게 추격해오자 그는 1941년 봄, 부대를 이끌고 소만(蘇滿)국경지대의 소련 영내로 이동했다. 그뒤 만주와 조선북부지방에 소조(小組)를 파견하여 대일항전을 계속했으며, 1942년 7월 동북항일연군의 후신으로 동북항일연군교도려(東北抗日聯軍矯導旅)가 결성되자 이 부대의 제1영 영장(營長)이 되었다. 8·15해방 직전 동북항일연군교도려에서 최용건(崔庸健)·김책(金策)·안길 등과 함께 조선의 해방사업을 추진할 조선공작단을 만들어 단장에 취임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대일참전이 시작되자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소속의 일부 유격대원들은 소련군과 함께 만주와 우리나라 북부지방으로 진격해 들어왔으며, 그도 9월 중순경 최용건·김책 등 지도급 동료들과 원산항을 통해 귀국했다.

귀국 후 가명을 쓰고 비밀리에 북한 전역을 순회했다. 그가 북한 대중들에게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에서였다.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원 및 열성자대회'(1945. 10. 10~10. 13)에 참석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12월 17일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분국 책임비서로 취임했다. 이어서 1946년 2월 북한에서 임시중앙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에 선임되어 토지개혁 등 여러 가지 반제반봉건적 성격을 갖는 개혁들을 추진했다. 이후 1947년 2월 북한주민들의 선거로 결성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수상에 선임되었다. 1949년 6월 남·북노동당이 합쳐서 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으며, 이때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내각수상직에 있으면서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인민군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폐허가 된 북한사회의 전후복구건설방향으로 '중공업 우선의 경공업, 농업의 동시발전' 노선을 제창하는 한편 농업의 협동화를 위시해 급격한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이 전후복구건설노선에 대하여 조선노동당 안의 일부세력이 반대하고 이를 소련이 두둔하여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1956년 8월 발생한 8월종파사건 을 계기로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소련의 영향력 배제에도 어느 정도 성공하여 자신을 정점으로 한 유일지도체계 확립의 기반을 닦았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일지도체계를 더욱 강화했으며, 그 일환으로 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북한 정치체계 전반을 관장할 조선노동당 비서국이 신설되자 총비서로 취임했다. 그가 주체사상을 공개적으로 제창하기 시작한 것은 1965년부터였다. 그는 주체사상을 제창하면서 이 사상을 북한사회의 유일사상으로 만들려고 했다.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는 조선노동당 내에서 일부 반대도 있었으나 1967년 5월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의 사상투쟁을 계기로 반대세력은 자취를 감추었다. 주체사상의 현실에 대한 적용과 이론의 체계화가 본격화되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에서 그의 유일 지도체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1972년 새로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에 의해 신설된 국가 주석에 취임했다. 주석은 구헌법의 내각수상보다 훨씬 강력한 지위와 역할을 갖는 직책으로 국가의 수반이며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직책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주석제도의 신설은 당시 체계화되기 시작한 주체사상의 '혁명적 수령관'을 현실적으로 제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령으로 접어드는 1980년대에 들어서자 공개적으로 아들인 김정일(金正日)을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일환으로 1980년 10월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는 김정일의 공개적인 등장과 함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수"할 것이 강조되었다. 동 대회 이후 국내부문의 지도를 점차적으로 김정일에게 맡기면서 자신은 통일·외교 분야를 주로 관장하는 형식으로 권력승계 작업을 추진해갔다. 그결과 1980년대말에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를 위한 준비작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는 통일·외교 분야에서도 김정일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또한 1991년 12월 24일 당전원회의를 열어 김정일을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했다. 1992년 4월 13일 생일을 앞두고 그는 대원수(大元帥)에 추대되었으며, 21일 김정일을 원수로 추대하여 본격적인 권력승계를 진행시켰다. 1994년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사망했는데, 사인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으나 북한측은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마비로 공식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