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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45. 08. 15 - [광복절] 일본 2차세계대전 항복, 한반도 해방

한국은 약 35년 간의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저항을 통해
민족성을 지키고 독립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 더불어 1943년 11월에 미국·영국·중국 3국이 발표한 '카이로 선언'을 통해
일본의 패망 후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것을 결의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았다.
이후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자
8월 8일에 미국·영국·중국·소련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한민족은 드디어 오랜 투쟁 끝에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가 항복하고, 여운형은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5개 조항을 요구하여 관철하였다.

1. 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것.
2. 서울의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것.
4. 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8월 15일 오전 9시경 마포형무소 앞에는 그날 중대한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붙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일본 왕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로 중계되었다.

흔히 이 날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은 군중들이 그날 바로 태극기를 들고 쏟아져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일본 왕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한자가 섞여있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그 당시 쓰던 일본어가 아닌, 일본 황족어로 방송이 나왔기 때문에 때문에
대부분의 군중들은 방송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3.1 운동 이후로 태극기를 모조리 압수당한지 20년이 넘게 지난 상황이었고
항복선언을 했음에도 여전히 일본군이 총칼을 들고 위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에
8월 15일 당일은 알려진것과는 다르게 군중과 거리가 조용했다.
 
다음 날인 8월 16일, 여운형의 5개 조항대로 독립운동가와 사상범이 석방되기 시작하자 
그 때서야 경성 시민들은 어제의 방송이 일본 왕의 항복 방송인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