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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75.08.17 장준하 추락 의문사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고성면연하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고 대관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다니다 교사였던 부친의 전근지를 따라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38년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에서 교사로 부임하였다.1941년 고등 신학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도요대학예과(철학)를 거쳐 니혼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니혼신학교에는 문익환, 전택부, 김익준 등 한국에서 건너간 많은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었다.

1942년 태평양전쟁에서 기세등등했던 일본었지만 1943년 미국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조선인 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하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일본유학을 1년으로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신안소학교 시절 제자였던 김희숙과 결혼하고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조선군사령부 39여단 42연대에 배속되어 그해 2월 중국 장쑤성 쉬저우 쓰카다부대에 배치되었다. 탈출의 기회를 엿보다가 7월 7일 홍석훈 김영록윤경빈과 함께 일본군부대를 탈출하여 중국군에 합류했다. 이때 먼저 탈출하였던 김준엽을 만나 평생의 동지가 되었고 중국공산군의 습격으로 그의 부대가 괴멸되자 광복군이 있는 충칭까지 6000리 길을 걸어서 이동하였다. 충칭으로 가는 도중 안후이성 린취안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 설치된 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기초적인 제식훈련을 받았으나 교육내용이 부실하자 훈련병들이 자체적인 수업을 진행하고 《등불》이라는 필사본 잡지를 발간했다. 《등불》은 후일 《사상계》로 발간된다. 1945년 1월 31일 53명의 동지들과 걸어서 파촉령의 험준한 겨울산을 넘어 충칭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김구 주석을 만났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난립한 정당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임정 국무위원들과 갈등을 일으켜 중경을 떠났다.

1945년 4월 이범석의 제안으로 광복군 장교가 되었고 한국으로 잠입하기 위해 비밀리에 진행된 미국 OSS대원으로 자원하여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았고 광복군 육군 대위가 되었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국내 잡입 작전은 취소되고 말았다. 8월 18일 연합군 군사사절단의 일원으로 이범석김준엽, 노능서와 함께 미군기를 타고 여의도에 착륙하였지만 일본군의 거부로 하루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편으로 귀국하였으며 주석 김구의 수행비서로 역할하였다. 하지만 이범석의 권유로 김구가 당수로 있는 한국독립당을 떠나 조선민족청년단(일명:족청)에 가입하여 교무처장이 되었다. 이범석은 이승만 측의 인물로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고 정권쟁취를 위한 독단에 환멸을 느껴 곧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48년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였고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하여 문화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한길회를 창립하여 뜻을 같이 하는 인사들과 함께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문교부장관 백낙준의 추천으로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에 소속되어 종합교양지 《사상(思想)》을 창간하였다. 하지만 이기붕과 박마리아의 방해로 폐간되자 이름을 바꾸어《사상계(思想界)》를 창간하였다. 《사상계》는 1955년 6월을 기점으로 발행부수가 2배로 확대되었고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데 앞장섰으며 국내 지식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최고의 잡지로 등극하였다. 장면 내각에서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아 국가 건설을 위한 정책기획을 담당했다. 하지만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한국사회가 또다시 격랑에 휩싸이게 되자 당시 혁명정부의 민정이양을 두고 박정희김종필 을 비판하는데 앞장섰고 이때문에 장준하와 《사상계》는 위기에 내몰렸다. 1962년 한국인 최초의 막사이사이(Magsaysay) 언론상을 수상하면서 장준하와 《사상계》가 이룬 업적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추진했던 대일외교, 월남파병 등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1967년 정계에 들어가 그해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으로 복귀하였으며, 1973년 민주통일당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하여 박정희정권에 맞섰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썼으나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추락하는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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