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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898.9.5-<황성신문> 창간되다.

 

황성신문 창간호(1898년)

1898년 9월 5일 사장 남궁 억, 총무원 나수연 등이 국민지식의 계발과 외세침입에 대한 항쟁의 기치 아래 지금의 서울 광화문에서 창간하였다. 남궁 억은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물려받아 오늘날의 합자회사와 같은 고금제(股金制)를 신문사상 최초로 채택해서 운영하였다.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라고 하나 거의 한자에 한글로 토를 단 정도의 한문위주의 문장으로 제작되어 ≪독립신문≫ 이후 여러 신문들이 순한글로 제작되던 전통을 깨뜨려 한학 식자층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1904년 6월 17일 일본인이 한국에서의 황무지개척권을 주한 일본공사를 통하여 한국정부에 요구해오자, 이 신문은 그 부당성을 여러 차례 사설로써 보도하여 그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구국민중대회의 모임인 ‘보안회(保安會)’의 활동을 지지하면서 상세히 보도하여 배일(排日)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대한제국정부가 일본측 요구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2월 24일 이 신문은 한일의정서의 조인 내용을 게재했다가 외부의 게재금지 명령으로 기사를 삭제당하여 문제된 기사의 활자를 뒤집어 인쇄함으로써 이른바 ‘벽돌신문’이 처음 나오게 되었다. 1905년 11월 20일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기사로 정간을 당하고, 사장 장지연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직원이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24일 장지연이 석방되고 발행정지도 동시에 해제되었으나 장기정간으로 재정난이 악화되어 2월 12일에야 겨우 속간할 수가 있었다.

 

이 신문은 합자회사 형식으로 경영되었으나 충분한 자본을 확보하지 못하고 독자들이 구독료를 잘 내지 않아 ‘사고(社告)’를 통하여 수차에 걸쳐 재정의 궁핍함을 밝혔다. 특히 1903년 2월 5일자 신문에 논설로써 신문발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구독료 미수금이 7,000여 원에 이르고 있고 용지 및 잉크값 등이 2,000여 원이나 밀려 폐간지경에 있음을 밝히자, 각계의 뜻있는 사람들이 10원 이상 200원까지 성금을 보내 곧 속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신문값은 제대로 걷히지 않아 경영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경영난을 광고를 통해 많이 해소시키기도 했는데 1900년 이후부터는 전체 지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품광고로는 약품과 서적이 가장 많았으며, 비상품광고로는 사회의 어지러움을 반영하는 분실·개명·사기·경고 등의 광고건수가 많았다.

 

이렇듯 심한 경영난을 겪다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강행되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 漢城新聞≫으로 바뀌어 8월 30일자부터 9월 14일(제3470호)까지 발행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이 신문은 경술국치 전까지 ≪뎨국신문≫과 함께 민족의식의 고취와 문명개화의 선구자로서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지로서 평가받을 수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