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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23. 05. 24 - 독립운동가 김인전 사망

 

 

한국의 독립운동가

을미사변 등 국내정세가 혼란했던 대한제국 시기에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주력하다가 1910년을 전후로 일제의 침략이 완전히 표면화 되면서부터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보다도 많은 우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있는 만주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떠났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상해로 거처를 옮겨 임시정부의 소속원으로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2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 재무예산위원으로 피선되자 임시의정원의 살림을 도맡아야하였다. 즉 의정원에서는 인구세의 징수, 국내외에서의 독립공채발행, 구국활동을 위한 재정단을 조직하는 일을 맡았으나 예산과 결산만큼은 행정부에 전담하였다. 동년 4월에는 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이 되어 군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임시정부의 대외군사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이므로 그는 장기적 독립전쟁을 위해 지구력과 규율을 확보하는 방법으로서 군사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군사회의의 개최와 군인학과의 개설, 사업부의 설치, 국민의용병 등을 모집하여 대오를 편성하게 하였다. 또한 군사교육의 실시와 독립전쟁을 하기위한 지역 선정, 외국의 사관학교에 무관학생을 파견하고 군사선전대를 마련하는 등 직접적 전쟁에 대비키 위한 전열을 가다듬는 등 안건을 내세원 실천토록 하였다.

 

1921년 3월에는 대한예수교진정회 서기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선언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안창호등과 중한호조사를 설립하여 한·중간의 유대강화에 기여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학무총장대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동년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자금조달에 전념하였으며, 11월에는 의정원 의원 25명이 연서한 독립청원서를 태평양회의에 제출하였다.

 

1922년 10월에는한국 노병회를 발기하여 군대 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 조달에 주력하였는데 그는 노병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4월에는 경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노병회는 1932년 10월 해산할 때까지 무장 항일투쟁을 위한 간부양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헌신하던 그는 1923년 5월 과로로 순국하니,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같이하였으며, 상해 외국인묘지(B39)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도서: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5卷, 國家報勳處, 1988年, pp.523~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