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이슈

[사회]박근혜 '아킬레스건', 장준하는 누구?

김일성, 김대중, 전태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당대 혹은 후대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라이벌로 꼽힌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김일성과 김대중은 박 전 대통령의 생전에 라이벌로 거론됐고,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박정희식 산업화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의 라이벌로 후대에 꼽힌 인물입니다.

여기에서 빠뜨리기 어려운 사람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장준하입니다.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서 박정희의 독재를 비판한 장준하는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서 철권통치를 하던 박 전 대통령에게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장준하는 박 전 대통령과 한창 대립각을 세우던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로부터 37년. 장준하 타살 의혹이 다시 부각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인 1975년 2월 21일, 민주 회복을 위한 모든 국민의 노력을 단일화할 것을 촉구하는 장준하. 그 오른쪽은 함석헌. ⓒ연합뉴스

 

'친일'과 '독재'라는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을 정면으로 겨냥한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장준하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1944년, 26세이던 장준하는 학도병으로 중국에 끌려갑니다.
이때 장준하는 목숨을 걸고 새로운 삶을 선택합니다.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탈출에 성공한 장준하는 잠시 중국군 진영에 머물다, 6000리 길을 걸어 충칭으로 갑니다. 충칭에는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장준하는 고대하던 광복군으로 거듭납니다. 광복군 장교 장준하는 국내 진공을 꿈꾸며, 동료들과 함께 미군 OSS(CIA 전신)에서 특수 훈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면서,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은 실행되지 않습니다. 해방 후 한반도는 분할 점령되고, 임정은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로 인정받지 못하고 '여러 정치 세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상황이 임정의 기대와 다르게 전개되던 이때, 장준하는 귀국해서 김구의 비서로 활동합니다. 김구의 곁을 떠난 후, 장준하는 정치 일선에서 한 걸음 떨어져 문화 사업에 힘을 쏟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잡지 <사상계>를 만든 것입니다. <사상계>는 자유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선도 지키지 않던 이승만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던 지식인들은 <사상계>에 호응했습니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나고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선 후, 장준하는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던 중,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민주당 정부가 무너지고 박정희가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습니다. 그 후 장준하와 박정희의 본격적인 대결이 펼쳐집니다.

<사상계>는 쿠데타 세력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사상계> 그룹으로 분류되던 인사들은 새로운 집권 세력에 비판적인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나뉘는데, 장준하는 전자의 인사들과 함께 박정희 세력에 맞섭니다.

1962년 7월부터 <사상계>에는 박정희 세력을 비판하는 글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합니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장준하는 더 강도 높게 박정희를 비판합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각계의 반대를 힘으로 누르고 한일협정을 추진하면서 비판의 강도는 더 높아졌습니다. 광복군 출신 장준하는 전국을 돌며 '박정희 정권이 대일 굴욕외교를 하고 있다'고 질타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장준하는 1966년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자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온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또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장준하는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은 삼성그룹과 박정희 대통령의 유착 의혹이 짙게 제기된 사안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를 놔두지 않았습니다. 거듭 장준하를 체포하고 옥에 가뒀습니다. 1970년에는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사상계>를 폐간시켰습니다. 10월유신 이후인 1974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장준하에게 15년형을 선고했습니다.

가석방된 후에도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에 고개 숙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타살 의혹이 제기됐지만,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대에 그러한 의혹을 공론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37주기를 앞둔 8월 15일 타살 의혹에 힘을 실어주는 내용이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원문보기


관련기사

한국일보, 장준하 선생 유골 사진·소견서 공개,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208/h2012081623315121950.htm

경향신문, 장준하 선생 머리뼈 골절 사진 첫 공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62313035&code=940202

서울신문, 불거진 장준하 타살 의혹 대선 국면 ‘핫 이슈’ 부상,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817008017

동아일보,민주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사실땐 朴 물러나야”, http://news.donga.com/3/all/20120817/486847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