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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48. 07. 24 - 대한민국 첫 대통령, 부통령 임기 시작

초대 대통령 이승만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을 제1대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은 윤보선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했다.
그러나 한민당에 의해 내각 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하며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후 헌법 제정과 함께 대통령 선거가 준비된다.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제헌 국회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7월 24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8월 15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중앙청에서 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와는 타협이 어렵다고 본 이시영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적극 지지하는 인사 중 한명이었다.
이후 이승만은 그를 부통령에 낙점하였지만 부통령을 두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의견이 조정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한민당 당수 김성수를 불러 이시영을 부통령에 앉힐 뜻을 비췄고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즉석에서 동의하였다.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선출된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에 113표를 얻었으나
2차 선거에서 133표를 얻어 대한민국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시영은 이승만에게 임시 정부 출신 인사들을 일부 등용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49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으로 변경)을 수여 받았다.
1949년 6월 김구가 암살되자 문상 후, 추도사를 발표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후 이시영은 다른 국무위원들과 함께 서울에서 대전으로 피신해 있다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으로 피난해 있던 중,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을 지켜보면서 제1공화국 정부에 대한 깊은 실망감에 빠져 부통령직 사퇴를 결심하였다.
5월 9일 이시영은 언론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대한민국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하고 사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