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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67. 07. 23 미국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

현재 미국사회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법적처벌과 시민들의 의식의 변화로 과거만큼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회가 구성되기까지 과거에는 많은 투쟁 혹은 폭동이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 1967년 미국의 항구도시로 유명한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한 흑인폭동도 하나로 손꼽히지 않은가 생각한다.

 

2002년도에 개봉한 에미넴 주연의 '8마일'을 보거나 들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배경이기도한 디트로이트의 8마일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다. 앞서 이사실을 말해주는 이유는 폭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8마일 로드' 때문이다.

미국의 디트로이트는 분단지역으로 이 분단의 한가운데를 ‘8마일 로드(eight mile road)’가 가로지르고 있다. 1920년대 흑인들이 남쪽 도시 중심부로 몰려들자 백인들은 이 도로를 건너 북쪽 외곽지역으로 옮겨갔다. 8마일 로드는 인종의 경계선인 셈이다.

북쪽으로 건너간 백인들은 1950년8마일의 도로를 따라 2M높이의 콘크리트 차단벽을 설치하였고, 차별은 더 심해졌다. 추가적으로 흑인에 대한 실직적인 차별문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수렁에 빠진 베트남전의 전쟁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부가 약속했던 복지정책마저 실행하지 않았다.이러는 상황에서 시내의 한 무허가 술집을 단속하던 백인 경찰들이 80여 명에 달하는 흑인 손님 전원을 체포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흑인들의 근처 상가의 유리창을 깨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폭동은 시작되었다.

 

 

 

이어서 전국적 규모로 번져 동부 뉴욕에서 서부 샌프란시스코까지 그리고 북부 디트로이트와 그랜드래피즈, 또 시카고에 있는 남부 피닉스와 휴스턴에 이르기까지 전국 17개 도시에서 연달아 있어났다. 뉴욕시 맨허튼의 가장 번화한 5번가에서도 흑인 청소년들이 7월 26일 밤 상가를 파괴,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당시 대통령인 린든 존슨은 마비된 디트로이트에 4100여명의 공수부대를 침투시켰고, 연방군이 투입된 디트로이트시는 27일 밤 저격수들과의 총격전이 그치고 폭동 발생 5일만에 점차 평온을 돼 찾았다.

총 5일간 진행되었으며 23개의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디트로이트시의 사망자수는 36명으로 미국현대사상 가장 큰 폭동 피해를 기록했고, 부상자도 약2천명, 체포된 시민수는 3천5백명에 달하며 방화 / 약탈로 인한 피해액은 그 당시 1억 5천만 달러 이상으로 집계되었다.

이후 미국정부는 사회 무질서 대책 국가자문위원회(커너 위원회)를 만들었다. 커너 위원회는 1968년 2월 29일 "미국은 두 개의 사회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하나는 흑인사회, 하나는 백인사회다. 두 사회는 분리되어 있고 불평등하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했다. 흑인 폭동의 원인은 백인 사회의 인종주의라고 못박았다. 흑인에게 눈총을 보냈던 백인 사회는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을 통해 흑인과 저소득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종 차별을 없애고 일자리를 창출하자." 커너 위원회 개혁안은 이상적이었지만 폭동이 잠잠해지자 정치권은 모른 척했다. 백인은 흑인 폭동을 계기로 서둘러 디트로이트에서 벗어났고, 일본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자동차 산업은 점점 쇠퇴했다. 흑인만 남은 도심 한복판에 인종차별은 사라졌지만 일자리는 줄었다. 한때 200만명에 육박했던 디트로이트 인구는 올해 70만명까지 줄었다. 실천이 따르지 않은 개혁은 공수표에 불과했다.

 

 

2012년 현재까지의 인종차별이 줄어들 수 있었던 좋은 사례지만 그 당시 또한 정부의 겉핥기 식의 대응은 존재 했었다.

글로벌 사회가된 지금도 여전히 미국사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인종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다. 꼭 투쟁이나 폭동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되고 있는 사회에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손실도 줄이는 방법을 생각 할 수 있었으면 한다.

 

ⓒutokpia_JACK

(utokpiajac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