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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76.09.09 - 마오쩌둥의 죽음

마오쩌둥[ Mao Zedong , 毛澤東(모택동) ]

중국의 정치가로 중국공산당의 요직에서 활동하다가 중앙 제7차 전국대표회에서 연합정부론을 발표했다. 장제스와의 내전에 승리하고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국가주석 및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제2차 5개년개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죽기 직전 1976년 4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이자 독재자였던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었다.

중공 당주석 모택동이 1976년 9월 9일 오전 0시 10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83세였다. 사망 소식은 오후 4시 장송곡이 방송에 일제히 울려 퍼지며 알려졌다. 방송 직후 천안문 앞 국기 게양대에 걸려 있던 오성 홍기는 반기가 되었다. 방송이 끝나고 국제 공산당의 노래 `인터내셔널가`가 흘러 나오자 사람들은 오열했다. 중화 인민 공화국의 상징이었던 카리스마의 죽음은 전 세계에 충격과 감회를 안겨 주었다. 중국 내에서는 특히 그 충격이 컸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휑하게 뚫린 큰 공백에 망연자실했다.

모택동의 생애는 `혁명`이라는 두 글자에 점철되어 있다. 모택동의 일생은 곧 20세기 중국의 역사였다. 정강산 유격투쟁, 강서소비에트 임시정부, 대장정, 국공합작과 항일전,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근현대 한가운데엔 늘 모택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혁명의 주체를 농민으로 설정한 모택동의 이론은 분명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는 판이하게 구별되는 `모택동 사상`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체계화되었다. 유격전술, 대중조직방법, 토지개혁 정책, 민족통일전선론, 신민주주의론, 실천론, 모순론 어느 것 하나도 혁명의 역정을 통해 가다듬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이론은 반외세와 반파쇼, 그리고 반봉건을 동시에 밀고 나가야 했던 제3세계의 혁명가들에게만이 아니라, 서유럽의 좌파 이론가들에게까지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인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달성한 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개혁 정책인 대약진 운동은 실패로 끝난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