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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28. 05. 23 - 조명하 의사, 일본 육군 대장에게 독검을 찔러

 

이국 땅에서 일본 천황의 장인에게 독검을 찌른 조명하 의사.

 

1905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조명하 의사는 어릴 때 한문을 배우고, 황해도 풍천보통학교와 송화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20살에 결혼을 하고 21살 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신천군청 서기가 되었는데요. 공무원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6.10만세 운동, 송학선의 금호문의거, 나석주의 조선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의거 등을 겪으며 그것을 본 조명하 의사는 공무원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독립운동에 투신 할 것을 결심합니다.

  

1928년 5월14일 오전 9시55분경, 무개차 한 대가 대만 타이중시 다이쇼초도서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차가 커브길을 도는 순간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차로 뛰어올랐습니다.

 

차 안에는 대만 주둔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해 대만을 방문한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가 타고 있었습니다. 청년이 독이 묻은 단검으로 구니노미야를 찔렀으나 독검은 그의 왼쪽 어깨를 스치기만 하고 운전사 손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다시 군인을 향해 독검을 던졌다. 역시 빗나갔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된 청년은 스물 세살의 조명하였습니다.

 

대만은 조명하가 일본에서 상하이로 가던 중 일시 체류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조명하는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해탄을 건너 낮에는 공장ㆍ상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며 기회를 노렸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않자 상하이에서 뜻을 펼칠 생각이었습니다.

 

구니노미야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사망했고, 조명하는 황족위해죄로 그해 10월10일 이국땅에서 처형됐습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이런 말을 남겼는데요.

 

"아무 할 말은 없다. 나는 대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다만 조국의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리라"

 

이 말은 남긴 조명하 의사는 의기가 빛나는 23세의 열혈 청년이었습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까지 조국광복의 염원을 외친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naver.com/bohunstar/13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