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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오늘의 역사

1973.8.8-김대중 납치사건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도쿄의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0호실 부근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8월 13일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입니다. 사건발생 당시 김대중은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한국 정보기관 요원 5명에게 납치, 수장(水葬) 직전 극적으로 구출되어 사건발생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집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박정희의 최대의 정적으로 등장한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될 당시 지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중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 해외에서 반유신활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정력적으로.. 더보기
1964. 08. 07 - 미국, '통킹 만 결의' 의결 1964년 8월 7일, 미 의회는 북베트남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인 '통킹 만 결의'를 의결하였다. 1964년 8월 2일 통킹 만 해상에서는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하면서 발발한 일명 '통킹 만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교전의 결과로 북베트남 해군은 어뢰정 3척이 손상을 입었고, 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를 남겼다. 미해군은 구축함 1척과 항공기 1대에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전상자는 없었다. 미국은 이 통킹 만 사건을 명분으로 베트남에 대해 공개적으로 군사 개입을 강화하게 된다. 이듬해 2월부터 미군은 B-52 폭격기를 동원해 북 베트남 폭격에 나섰고, 지상군이 대거 파견되었다. 이윽고 북베트남군이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제 2차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더보기
1945. 08. 06 -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6일 서태평양 티니안섬 기지를 출발한 B29기는 '리틀보이'로 불리는 원자폭탄 1호를 히로시마 상공 9600m 지점에서 투하하였다. 원폭이 투하되며 버섯구름이 일어나였고, 원폭이 투하된 자리(폭심지) 500m 근방에 있는 모든 생물은 엄청난 불길과 열기속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원폭 투하 2~4개월 후 90,000 ~ 166,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집게 되는데, 이는 원폭 투하 후 바로 집게 된 도시의 수치가 더 많기 때문에 실제로 사망자 수는 이보다 더욱 더 많을 것으로 사료된다. 핵폭탄을 맞고 6일 후 일본은 항복선언을 했으며, 비핵 3원칙을 수용하여 "핵무기를 만들지 않으며, 갖지 않으며, 들여오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고 제 2차 세계대전은 끝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 더보기
1962.08.05 - 화련한 인생 뒤 아픔을 가진 배우 마릴린 먼로 사망 아름다운 금발의 매력으로 세계적인 섹시 디바로 사랑받았지만 누구보다 외로웠고 누구보다 사랑이 고팠던 마지막까지 쓸쓸한 생을 살다간 마릴린 먼로 세상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강했고 모든 여자들처럼 자신만의 모습으로 우뚝 서고자 했던 마릴린 먼로 고아 소녀가 스타가 되기까지 가장 화려한 스타였으나, 한편으로 가장 불행한 여인이기도 했던 마릴린 먼로는 그 출생부터가 비극적이었습니다. 1926년 6월 1일 먼로는 어머니 글래디스 펄 베이커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의 이름은 노마 진이었습니다. 출생신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버지 마틴 E. 모텐슨은 친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실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직장 동료였던 스탠리 기포드. 훗날 먼로는 여러 번 친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딸을 만나기를 꺼려했습니다... 더보기
1988.8.4- 도청장치 방송사고 도청장치 방송사고는 1988년 8월 4일 21시 20분쯤에 MBC 보도국 A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중이었던 뉴스데스크에서 발생한 황당한 사건입니다. 이 방송사고는 당시 대한민국 생방송 사상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서울특별시 지하철 노선 증설 및 이에 따른 요금 인상에 관한 보도를 하던 중 소창영(蘇昌永, 당시 나이 24세)이라는 청년이 스튜 디오로 무단 침입하여 앵커의 마이크를 빼앗으려는 등 19초 동안 뉴스 진행을 방해하는 소동을 벌여 뉴스 진행이 중단되었는데 이러한 장면이 전국에 생방송이 되었습니다. “ 강성구 : 서울시는 새로운 지하철 건설에 필요한 재원을... 소창영 : 귓 속에 도청장치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귓 속에 도청장치가 들어 있습니다! 저는...(이때 보도국 직원들이 달려들어 괴청년을 스.. 더보기
1492. 08. 03 - 콜럼버스의 첫 항해 출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나아가면 인도 동해안에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 루트를 탐험 준비 중이던 주앙 2세는 이를 거절했고,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로 향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여기에 더 넓은 선교지를 필요로 하던 당시 스페인 교회의 성직자들의 요구가 겹쳐지면서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사벨 여.. 더보기
1999.08.02 - 라이언킹 이승엽, 43호 홈런으로 시즌최다홈런 신기록 `라이언 킹` 이승엽이 한 시즌 최다홈런을 기록했다. 이승엽은 1999년 8월 2일 대구시민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경기 5회말 공격에서 롯데 선발 문동환이 던진 142㎞ 직구를 경쾌한 타구음과 함께 쳐내면서 마침내 시즌 최다홈런을 기록했다. 43호 홈런이었다. 1998년 외국인선수 슬러거 타이론 우즈(두산)에게 내줬던 홈런신기록을 1년도 안돼 갈아치우며 18년째인 한국프로야구에 또하나의 새로운 신화를 기록했다. 1999년 7월 25일 대구 해태전에서 42호 홈런을 때린 이후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21타석 13타수1안타로 부진을 보였던 이승엽은 이날 쳐낸 홈런으로 왕중왕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야구의 꽃` 홈런포로 한국 야구사를 다시 쓴 이승엽은 어려서부터 야구천재였다. 경상중을 거쳐 야구명문 경북고에.. 더보기
1976.08.01-양정모, 건국 후 올림픽 첫 금메달 (출처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1207/h2012073020183891560.htm) 1976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전국이 35도를 넘는 찜통 더위가 계속됐고 비마저 내리지 않아 농민들은 갈라진 논바닥마냥 애가 탔다. 8월 1일 일요일 아침, 멀리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국민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한국 레슬링 양정모 선수가 드디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경기 실황을 중계하는 라디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감격과 흥분으로 떨렸다. 신문이 발행되지 않던 일요일이라 호외가 뿌려졌고 조간으로 발행되던 한국일보는 이튿날 총 8개면 중 무려 6개 면을 할애해 이 소식을 전했다. '올림픽 금메달의 숙원은 대회 참.. 더보기
1944.7.31- 어린왕자의 작가 생택줴페리 사망 1942년 초 뉴욕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생텍쥐페리는 흰 냅킨에 장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식당 종업원이 옆에서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함께 식사하던 출판업자 커티스 히치콕이 생텍쥐페리에게 뭘 그리는 것인지 물었다. 생텍쥐페리가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마음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한 어린 녀석이지요.” 히치콕이 그림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 어린 녀석 말입니다. 이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시면 어떨까요. 어린이용 이야기로 말이지요. 올해 성탄절 전에 책을 낼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말입니다.” 며칠 뒤 생텍쥐페리는 친구 레옹 윈체슬라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날보고 어린이 책을 써보라는 데, 날 문방구에 좀 데려다 주시오. 색연필을 사야 하니 말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착상을 색연.. 더보기
1971.07.30 - 서울외곽에 그린벨트 첫 지정 ⓒ조선닷컴 1971년 7월30일, 건설부 고시로 서울 외곽지역에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가 처음 지정됐다. 서울 중심부에서 반경 15km를 따라 폭 2~10km 지역의 서울,경기땅 454.2㎢(첫 발표 때는 467㎢)의 개발을 묶는다는 내용이었다.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과 토지 투기 억제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공식 발표하지 않고 슬그머니 관보에만 실어 밀실행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 사실이 슬금슬금 알려져 해당 지역의 땅값이 폭락하기 시작하자 토지 소유자들이 사유재산권 침해라며 반발하고 반발하고 나섰으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부산,대구,광주 등을 시작으로 1977년 전남 여천 일대에 마지막 그린벵트를 지정할 때까지 총 8차례에 걸쳐 그린벨트를 확대해 갔다. 그 결과 전 국토의 5.4..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