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1994.09.19 지존파 사건 추석연휴 마지막날인 1994년 9월 19일 `살인공장`까지 차려놓고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른 이른바 `지존파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이 거처하며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일삼은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아지트 지하실은 끔직한 `인간 도살장` 이었다. 잔인한 고문과 살인행위가 벌어졌던 감금시설과 시체를 태우는 소각장까지 모두 갖춘 지하실현장에는 유골 2구가 소각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시체를 태울 때 뿜어나온 가스가 그대로 남은 듯 매캐한 냄새가 났다. 상상조차하기 힘든 온갖 범행 수법과 잔인함 그리고 완전범죄를 노린 치밀한 사전 준비. 7인조 ‘지존파’가 저지른 연쇄납치ㆍ 살해ㆍ 시체유기 사건은 지금까지 있었던 강력범죄의 수법을 총망라한 집합체라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끔찍한 것이어서 세상을 소스라치게.. 더보기
1976.09.09 - 마오쩌둥의 죽음 마오쩌둥[ Mao Zedong , 毛澤東(모택동) ] 중국의 정치가로 중국공산당의 요직에서 활동하다가 중앙 제7차 전국대표회에서 연합정부론을 발표했다. 장제스와의 내전에 승리하고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국가주석 및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제2차 5개년개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죽기 직전 1976년 4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이자 독재자였던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었다. 중공 당주석 모택동이 1976년 9월 9일 오전 0시 10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83세였다. 사망 소식은 오후 4시 장송곡이 방송에 일제히 울려 퍼지며 알려졌다. 방송 직후 천안문 앞 국기 게양대에 걸려.. 더보기
1270. 08. 19 - 삼별초, 진도에 도착하여 항전 삼별초 [출처 : 위키백과] 원래 삼별초에서의 “별초”(別抄)란 ‘임시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의 일반명사, 일종의 유격대를 말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여기에는 정규군이 아니었다는 뜻도 담겨 있다. 삼별초는 처음에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유래한다. 야별초는 1219년 최우가 권력 보호를 위해 조직한 사병이었는데, 뒤에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는 정규군으로 편성되었다. 그에 따라 야별초는 다시 좌별초, 우별초로 나뉘었으며, 몽고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거나 탈출한 이들로 이루어진 신의군을 일컬어 삼별초라 불렀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 몽고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최우의 무신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몽고에 맞서 항전한다. 몽고는 고려에게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하며 .. 더보기
1975.08.17 장준하 추락 의문사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고성면연하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고 대관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다니다 교사였던 부친의 전근지를 따라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38년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에서 교사로 부임하였다.1941년 고등 신학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도요대학예과(철학)를 거쳐 니혼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니혼신학교에는 문익환, 전택부, 김익준 등 한국에서 건너간 많은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었다. 1942년 태평양전쟁에서 기세등등했던 일본었지만 1943년 미국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조선인 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하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일본유학을 1년으로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신안소학교 시절 제자였던 김희숙과 결혼하고 194.. 더보기
1945. 08. 15 - [광복절] 일본 2차세계대전 항복, 한반도 해방 한국은 약 35년 간의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저항을 통해 민족성을 지키고 독립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 더불어 1943년 11월에 미국·영국·중국 3국이 발표한 '카이로 선언'을 통해 일본의 패망 후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것을 결의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았다. 이후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자 8월 8일에 미국·영국·중국·소련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한민족은 드디어 오랜 투쟁 끝에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가 항복하고, 여운형은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5개 조항을 요구하여 관철하였다. 1. 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 더보기
1492. 08. 03 - 콜럼버스의 첫 항해 출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나아가면 인도 동해안에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 루트를 탐험 준비 중이던 주앙 2세는 이를 거절했고,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로 향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여기에 더 넓은 선교지를 필요로 하던 당시 스페인 교회의 성직자들의 요구가 겹쳐지면서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사벨 여.. 더보기
2010. 7. 22 오늘의 역사 - 페이스북 가입자 5억명 돌파 아시아권 가입 급증 국내이용자 217만명 세계 최대 사회관계망 서비스인 ‘페이스북’(facebook.com) 사용자가 5억명을 돌파했다. 페이스북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마크 주커버그는 22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실제 이용자가 5억명을 넘어섰다”며 “페이스북의 임무는 세계를 더 열린 사회로 만들고 서로 연결되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주커버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만난 100명의 친구들과 조깅을 같이하는 덴마크 총리와 낡은 극장을 새로 짓는 모임을 만든 미국 고등학생 등을 구체적인 예로 들며 “서비스를 시작할 때 예견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쓰고 있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사용자 5억명이란 전 세계 인구의 8%, 인터넷 사용자의 27%가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페이스북은 국.. 더보기
1949. 06. 26 - 백범 김구 암살 대한독립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0분 경 현재 강북 삼성의료원이 들어서 있는 서울 경교장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자는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로, 그는 김구를 암살 한 뒤 태연하게 "내가 죽였다"며 검거에 응했다. 범인이 바로 체포되었고 또 범인이 범행을 시인했기 때문에 김구 암살사건은 곧바로 해결될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암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의혹점으로 인해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되고 있다. 1. 안두희의 신병을 확보한 헌병대가 범인을 감방에 가두지 않고 의무실에 보호조치 2. 특무대로 넘겨진 안두희에게 친일 헌병 출신에서 한국 군부 실세로 떠오른 김창룡 소위가 "안의사, 수고했소"라고 격려하며 술과 .. 더보기
1798. 06. 04 - 카사노바 사망 "나는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행한 모든 일들이 설령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해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쟈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 1725년 베니스 태생. 그의 부친은 배우였고 모친 역시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했던 미모의 여배우였다. 어린 시절의 카사노바는,자주 코피를 흘리는 심약한 소년이었지만, 강인한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했다고 알려져있다. 어릴때부터 명석함을 보인 카사노바는 파두아 대학을 졸업한 후 수도사가 되기위해 세인트 사이프리언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불미스러운 염문설 때문에 그곳에서 겨났다. 17세 때인 1742년엔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 1744년 카사노바는 로마 아콰비바 추기경의 비서가 됐으나, 다시 한번 염문설에 휘말려 사직했고, 베니스를 떠났.. 더보기
1492. 04. 17 - 스페인, 콜럼버스 항해 계약 이탈리아 출신의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84년 포르투갈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지원요청을 허락하지 않았고, 콜럼버스는 자신의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에스파냐로 향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는 부부로써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때 마침,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 2세는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기 위해 해외 진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을 찾아가 1.기사와 제독 작위 2.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부왕의 지위 3.얻은 .. 더보기